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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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식의‘미국 들여다보기’(39)

2022-05-3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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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민등록증이 없는 나라

“미국 주민등록증 좀 보여줘.”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미국에 살면서 잠시 다니러 온 손아래 처남과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미국 주민등록증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미국은 주민등록증이 없어요.” “그래? 그럼 미국은 뭘로 신분을 증명하지?” “운전면허증으로 해요.”
이상했다. 어떻게 주민등록증이 없을 수가 있지? 신분증으로는 주민등록증이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사회에서 30년 이상 살았기에 주민등록증이 없는 나라가 있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언제 어디서나 순식간에 단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반사적이고 즉각적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하는 주민등록번호가 아닌가 말이다. 그랬다. 미국은 주민등록증이 없고 운전면허증이 신분증이라는 것을 직접 와서 살아보면서 확실히 알게 되었다.

미국(United States)은 여러 개의 주(States)가 모여(United)서 이루어진 나라다. 하나의 나라를 여러 개의 주로 통치 편의상 나눈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주가 따로따로 있었는데 그들이 모여서 하나의 나라가 되었다. 즉 나라가 출발점이 아니라 각각의 주에서 출발한다. 각각의 주는 국방과 외교업무만 미국이라는 연방정부에 주었을 뿐이고 나머지 부분은 여전히 독립적으로 권한을 행사한다. 미국의 주는 ‘나라 안에 있는 또 다른 작은 나라’라는 느낌이다.

다른 나라와 직접 관계되는 여권은 미국이라는 연방정부가 관할하지만 운전면허는 국방도 아니고 외교업무도 아니므로 각 주가 관할한다. 각 주가 관할하기에 주마다 운전면허증 생긴 모양도 다 다르다. 그렇지만 모든 운전면허증에는 이름, 주소 그리고 사진이 들어있기 때문에 신분을 증명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본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사진이 있는 신분증 즉 포토 아이디(Photo ID) 제시 요구에는 운전면허증 제시로 응하면 된다.


운전면허증에 고유번호가 있기는 하지만 이 번호는 주정부가 관리하는 번호이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통일된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운전면허증이 신분증으로 사용되기는 하더라도 주민등록증처럼 광범위하게 사용될 수는 없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미국 국세청(Internal Revenue Service, 약칭 IRS)이 납세자 식별을 위해 신분증으로 쓰이는 운전면허증에 있는 번호를 사용한다고 생각해보자. 이 경우 IRS는 50개에 달하는 각 주의 운전면허번호를 모두 관리해야 한다. 만일 주민등록번호처럼 전국적으로 통용되는 식별번호가 있다면 서로 다른 50개 체계의 운전면허번호를 관리할 필요가 없다.

주민등록번호가 없는 미국은 이럴 때 사회보장번호를 사용한다. 연방정부에 속하는 사회보장국(Social Security Administration, 약칭 SSA)이 합법 신분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부여하는 번호인데 연방정부에서 부여하는 번호이기 때문에 어느 주에서나 통용된다. 마치 주민등록번호처럼 말이다.
연방정부가 부여하는 사회보장번호는 개개인을 구별하여 인식하는 수단이므로 국가 기관뿐만 아니라 일반 기업체에서도 널리 사용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신용정보관리회사이다.

미국에서는 신용점수(credit score)가 무척 중요하다. 이 신용점수가 높으면 대출받을 때에 낮은 이자율을 적용받을 수 있다. 대단한 혜택이 아닐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신용은, 대출금이든 할부금이든, 정해진 금액을 약속한 날짜에 꼬박꼬박 잘 갚는다는 것을 말한다. 빌린 돈을 잘 갚으면 점수가 올라가고 그렇지 않으면 점수가 낮아진다. 신용정보회사가 개개인의 신용점수를 산출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납부 이력 즉 연체에 관한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이때 이용되는 것이 사회보장번호이다.

은행 대출이든 카드를 이용한 물품구입이든 사정이 나빠져서 대출금이나 카드대금을 제 때에 갚지 못하고 연체하거나 아예 갚을 수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때 은행이나 카드사는 이미 확보하고 있는 고객의 사회보장번호와 함께 연체나 지급불능에 관한 정보를 신용정보관리회사에 알린다. 신용정보회사는 사회보장번호와 연계된 이런 정보들을 모아서 개개인의 신용평가를 하는 것이다. 모든 정보를 사회보장번호와 연계해두기만 하면 되니까 이 점은 주민등록번호와 같은 기능을 한다.

사회보장국은 사회보장번호를 부여받은 개개인에게 증서로 명함 정도 크기의 카드를 교부한다. 그렇다면 이 카드를 주민등록증처럼 사용하면 될 것 같은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 카드에는 사회보장번호와 이름 딱 이 두 가지만 적혀 있고 본인의 서명을 적어 넣는 부분이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주소도 없고 사진도 없다. 그래서 주민등록증처럼 신분증으로 사용할 수 없다.

사회보장국이 부여하는 사회보장번호는 전국적으로 그리고 신용과 관련되어 매우 광범위하게 통용되기 때문에 극도의 보안이 요구된다. 신분 도용을 하기 위해 범죄자들이 혈안이 되어 알아내려 애쓰는 번호다. 사회보장번호가 유출되면 엄청난 금전적 손실을 당할 가능성이 매우 커진다. 당하면 재앙 수준이다.

사족.
신용점수를 높이는 출발점은 빚을 내는 것이다. 일단 빚이 있어야 빚을 잘 갚는다는 즉 ‘약속(신용)을 잘 지킨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 자동차 등 모든 거래를 현찰로만 한다면 신용점수는 전혀 쌓이지 않는다. 좋은 조건의 빚을 내기 위해서는 빚을 잘 갚는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고, 빚을 잘 갚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먼저 빚을 내야 한다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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