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공격을 시작한지 한 달 쯤 지나서였다. 나는 어느 모임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대한제국 말 상황을 떠오르게 한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당시에 미국이 다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면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지도 않았고 후에 미국과 일본이 전쟁을 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그 때 미국이 국익 때문에 일본의 야욕을 눈감아 준 것이 이렇게 훗날 비판을 받고 당대를 살았던 미국인들도 같은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본다면, 우크라이나 사태가 눈 앞에 벌어지고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역시 역사의 심판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랬더니 모임 참석자 한 명이 책 한 권을 소개했다. 그 책의 저자가 나와 비슷한 주장을 폈다는 것이다. 나는 바로 그 책을 구해 진지하게 읽었다.
‘The Imperial Cruise’ 즉, ‘제국주의 유람선’ 이라는 제목의 그 책은 2009년에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 저자는 그 책에서 1905년 여름에 테드 루즈벨트 대통령의 딸인 앨리스와 태프트 전쟁장관의 아시아 방문에 대해 적고 있다. 7월 5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해 하와이, 일본, 필리핀, 중국, 한국, 그리고 다시 일본을 거친 방문이었다.
많은 연방의원들을 대동하고 Manchuria라는 이름의 유람선을 타고 이루어진 이 방문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일본과 미국이 한국의 장래를 놓고 ‘태프트 가쓰라 밀약’이라고 불리는 밀약에 이르는 협상을 벌이기 위해서였다고 저자는 주장했다. 대통령 딸인 앨리스가 방문단에 포함된 이유는 일반대중의 주의를 교란시키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리고 당시 미국의 외교정책과 미국인들의 사고는 백인우월주의에서 비롯된 미개한 국가에 대한 선진국가의 책임의식과 철저한 미국의 국익우선주의였다고 했다.
이 책의 내용을 비판하는 역사학자들도 많이 있다. 가장 큰 비판은 1905년 당시에 미국이 취한 입장을 36년 후의 일본과의 전쟁 그리고 그 후 1950년의 6.25전쟁까지 책임을 묻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라는 것이다. 한 역사적 사건을 두고 평가에 여러 다른 시각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비판들을 염두에 두고 그 책을 읽었다. 그런데 책 내용 중에 나 자신 한국인으로서 특히 가슴에 아픔으로 다가온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중국 상해에서 일본으로 향한 태프트 장관과 달리 북경을 거쳐 9월 19일에 한국에 도착한 앨리스 루즈벨트가 대한제국 황제에게 환대를 받는 모습이었다.
나라의 존망을 눈 앞에 두고 있던 고종황제는 황실의 전례와 의전을 무시한 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의 딸을 극진히 환대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황제의 개인열차를 내주었다. 서울 도착 때에는 황실밴드가 미국국가를 연주하게 했다. 또한 그때까지 외국인과 공개적으로 식사를 같이 한 적이 없는 고종황제가 점심 식사를 같이 했다. 황실의 여자들도 처음으로 식사를 같이 하도록 허용했다고 한다.
그 후에 고종황제는 한국에 있던 호머 헐버트 선교사를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밀사로 보낸다. 한국을 도와 달라는 탄원을 전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나 1905년 11월 15일에 미 국무성에 도착한 헐버트 선교사를 고위 관리들은 만나주지 않았다. 루즈벨트 대통령이 시간을 끌기 원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11월 17일에 일본정부는 이토 히로부미를 특사로 서울로 보내 강제로 대한제국이 을사늑약을 체결하게 한다.
그렇게 해서 외교권을 박탈 당한 대한제국 정부의 밀사를 미국 정부는 일본 정부를 통해 하라며 거부한다. 하지만 일본의 만행을 알리기 위한 접촉을 어찌 일본 정부의 허락을 받아서 한다는 말인가. 미국 정부는 한국과 한국민의 입장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일본이 얻고자 하는 것에 동의해 주면서 필리핀을 비롯한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챙기면 그만이었다. ‘미개’한 약소국인 한국은 그저 일본이라는 ‘명예 백인’ 국가를 통해 깨우쳐야 하는 대상에 불과했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제발 살려 달라고 미국과 서방국가에 하는 호소가 왠지 남다르지 않게 들린다. 나의 조국이 불과 백여년 전에 겪었던 똑같은 아픔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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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일룡 변호사,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