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5년 음력 3월 8일(양력 4월 28일), 현재의 위치 서울 중구 인현동(당시 이름 (건천동- 마른내 골)에서 태어나셨으니 올해로 만 477세가 되시는 셈이다.
오늘은 보통의 이순신 필설이 잘 짚어내지 않는 이순신 일생의 굴곡과 극적 반전이 어떻게 얽히고 풀리어 불세출의 지장 이순신을 완성해 내는가를 풀어 보기로 한다.
1. 구국의 인연과 우정
이순신의 일생은 세 사람과의 만남으로 용틀임을 겪으며 구국의 역정에 등단했다. 첫째는 출생지 건천동에서 10대 유소년기에 경상도 안동에서 올라온 글 잘하는 세 살 위 유성룡을 만나고 사귄 인연이다.
이 두 어린이의 사귐은, 이순신이 십대에 그 부친 이정이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여 현재의 현충사 일대인 아산 백암리의 외가로 이사해 왔으니 길어야 3년 내지 5년 이내 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짧은 만남은 뒷날 임진왜란을 당하여 서로 밀고 끌며 함께 나라를 구해 내는 구국의 우정으로 발전하였으니 이보다 더 나은 인연이 다시 있을까?
여기서 곁들여 주목할 점은 안동의 명문가 자손 유성룡이 유학을 와서 머물고, 허균의 형 허성과 원균도 살았다는 설화로 보아 이곳 건천동에 터를 잡았던 이순신 가문을 몰락한 선비 집안으로 설정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뒷날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 하자 이를 기려 그 어머니 초계 변씨가 자기 명의의 토지와 전국 여러 곳에 퍼져 있던 수십 명의 외거 노비들을 나누어 준 재산 분할 기록인 ‘분재기’가 가세를 실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인연은 이순신이 외갓 동네 아산에서 21살에 만나 결혼한 방씨 부인과의 만남이다. 이 혼인이 율곡과 같은 조선의 명문 문반인 덕수 이씨 자손이 엉뚱하게도 무반으로 전향하여 국토방위에 나서는 기상천외의 궤도 수정이며 불패의 구국명장 등장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아마도 장인 방진은 활을 잘 쏘는 명궁으로 사윗감이 믿음직하여 외동딸을 맡겼으나 할아버지 이백록이 중종 장례기간에 자식을 결혼시킨 죄목으로 과거시험 응시자격 박탈인 ‘탈고신’ 처벌을 받아 벼슬길이 막힌 사위가 실의에 차 있는 것을 보고 “그까짓 것 차라리 대장부답게 무인의 길을 가지 그러나?” 권고하고 재력을 기울여 무예 훈련을 뒷받침 했던 것은 아닐까? 이 혼인은 이순신을 무장의 길로 인도한 결정적 요소임이 분명하다.
세 번째 인연은 뜻밖에도 이순신을 가장 시기하고 미워한 선조 임금과의 연관이다. 임진왜란 발발 2년 전인 1590년 일본의 동정을 탐지하고자 파견했던 통신사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에서 안일에 취해 침략 가능성을 부정하던 조정에 점차 수상한 긴장이 높아 갔다.
다급해진 우유부단 무능의 군주 선조는 신통하게도 이때만은 현 직급에 관계없이 유능한 장수가 될 수 있는 인물을 추천하라는 특단의 ‘불차특용’을 공포했다. 그러자 좌의정으로 있던 유성룡이 정읍 현감으로 있던 건천동의 옛 친구 이순신을 역천 하여 그동안 함경도 변방 등 육지로만 떠돌던 이순신을 무려 7등급이나 파격 승진시켜 여수 전라좌수사로 드디어 물을 만나게 주선하였던 것이다. 실로 아슬아슬한 명장 탄생의 역정이다.
2. 천부적 직관과 창의 개선으로 ‘질 수 없는 전술’ 완성하다
알려진 바와 같이 이순신 해전의 핵심은 화약 무기인 화포전이다. 우리 역사상 해전에서 화포가 처음 동원된 해전은 1380년 고려 공민왕 6년 금강 하구인 진포에 침입한 500척의 왜구 선단을 최무선이 100척의 배로 화포 공격하여 불태워 버린 승리이다.
그러나 이 해전은 왜구들이 오백척의 배를 떠내려가지 못하도록 밧줄로 서로 얽어매어 놓고 일부 수비병만 남겨 놓은 채 내륙으로 노략질을 떠난 상태이었기 때문에 기동성 맞대결의 해전이 아니라 적선을 부수고 불태우는데 특효함을 입증한 사례가 되었다.
여수에 취임한 이순신은 직전 임금인 명종 대에 왜구들이 기어 올라오지 못 하도록 전투선 판옥선이 크고 높게 대형화 된 것을 보고 최무선 화포를 다수 탑재 장착한 본격 함포전을 착안 하셨을 것으로 추정 된다.
이로 인해 일본의 조총이 위력을 발휘한 육전과는 반대로 이순신 수군은 일본 조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안전하게 적선을 화포격파 함으로써 화포 한방으로 적군의 승선 인원 80명을 몰살 시키는 일방적인 전술에 다가섰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순신 장군께서는 한 가지 성에 차지 않는 현상을 보시게 된다. 당시의 화포는 정교하지 못하여 적중이 잘 되지 않는 것이었다. 해법은 적선에 다가가 근접사격을 하는 수밖에 없는데 적군의 조총 세례가 문제이었다. 이 문제의 해결책이 바로 조총이 뚫지 못하는 목제 등판을 덮은 거북선의 개발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적만 죽이고 우리는 다 살아남는 80:1 상승 전술의 완성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3. 이순신의 인류사적 공헌
이순신의 공훈은 조선을 구한 구국의 한계를 넘어 한중일 동양 3국의 역사 흐름을 바로 잡은 세계사적 기여를 빼놓을 수 없다. 임진왜란 종전 후 명나라 신종 황제가 이순신 사당에 팔사품을 보내어 감사를 표한 사실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전술적으로는 세계 최초로 본격 함포전법을 실행하셨고 인류 역사상 가장 일찍 방탄 거북선을 개발하여 현대의 거인 정주영으로 하여금 현대 조선 산업에 착수 하는 전기를 마련해 주셨으니 그 위대한 후덕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아 위대한 탄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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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원 / 이순신 숭모인, 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