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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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와 연암 박지원

2022-04-24 (일) 조태자 /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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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0년 정조대왕 4년 청나라 건륭황제의 만수절인 70세 생일을 맞이하여 조선이 축하사절단을 보내는데 그 일행 중에는 자제군관과 통역사, 서기, 마부, 하인 등 총 250명이 청나라로 떠나게 되었다.
‘열하일기’의 저자인 연암 박지원은 그의 삼종형인 박명원이 자제군관으로 발탁 되었으므로 청나라행에 동행 하게 되었고 박명원은 영조대왕의 사위였고 화평옹주의 남편이었다.

한성에서 출발하여 한달만에 압록강에 이르고 책문과 심양, 산해관을 지나 북경(연경)에 이르고 드디어 황제의 여름 별궁이 있는 열하에 이른다. 음력으로 6월 24일에 출발하여 장장 4천리길의 대장정에 오르니 당시 연암 박지원의 나이는 마흔넷이었다.
열하일기는 당대 최고의 명문장가인 박지원 선생이 청나라 문물과 문화와 산세와 지형과 서양을 알 수 있는 진기한 풍경들을 기록한 여행일지이다. 한문으로 기록한 열하일기는 고미숙 한국 여류 고전평론가가 오늘날의 생생한 언어로 생동감 넘치고 재치 있는 필치로 재번역, 구성하였고 오늘날 조선시대의 보물과 같은 고전이 되었다. 고미숙씨는 열하일기가 ‘세계 최고의 여행기’라고 격찬해 마지 않는다. 연암 박지원은 노론의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과거를 포기하고 벗들과 어울려 청춘을 보내며 “벗은 제2의 나다”라는 말을 남긴다.

우울증을 앓게 되어 병을 치료하기 위해 분뇨장수, 이야기꾼, 건달 등을 만나고 그 누구와도 친구가 될 수 있는 너그러운 성품의 소유자였던 연암은 백두산은 모든 강의 발원지이며 압록강은 그 서남쪽으로 흐르고 있다고 기록하였다.
드디어 조선과 중국 사이의 관문인 책문에 도착하여 중국의 주택가를 살펴보니 조선의 집들과는 비교도 안되게 모든 집들이 웅장하고 깊고 툭 트였다.
책문에서 비로소 선진국 중국의 면모를 보게 된 박지원 선생은 ‘이용과 후생’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즉 쓰임을 이롭게 함으로써 삶을 더욱 용이하게 하는 것 중국과 조선의 기와 이는 법이 다르고 책문 길거리의 많은 수레를 보면서 바퀴의 중요성에 크게 감명 받는다.


열흘을 가도 산이라곤 보이지 않는 그 광활한 평원, 요동벌판을 보는 순간 조선이 얼마나 좁은 땅이라는 것을 절감한다. 가는 길은 매우 험악하고 열악 하였다. 폭우 때문에 발이 묶이고 하룻밤에 일곱, 여덟번씩 예사로 강을 건너고 벌판 위에서 노숙 하는 일도 허다 하였다.
그 당시 조선의 선비들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조선땅에 있지만 연암 박지원은 이 여행을 통해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생각이 깊어진다. 드디어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산해관에 이르고 그는 기록 하기를 이곳이 얼마나 많은 전쟁의 원혼들이 떠돌고 있을 것인가 하고 원혼들에 대한 비가를 읊조린다. 사절단 속에는 말들도 있었는데 마부들이 마구 휘두르는 채찍에 연암은 말들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말들을 관찰하게 된다.

8월 초하룻날 일행은 마침내 천신만고 끝에 북경(연경)에 도착하게 된다. 북경은 과연 신통방통하고 생전 처음 보는 문물에 어리둥절 할 뿐이었다.
그런데 황제는 북경에 없고 열하에 있으니 당장 열하로 와서 황제를 알현 하라는 명령이 내려진다. 8월 5일 열하로 떠나기 앞서 모든것을 재점검 해 보니 모두들 발이 부르트고 말은 야위었고 하여 74명과 55마리의 말만이 열하로 나흘 밤낮을 죽기 살기로 달려갔다.

8월8일 새벽 마침내 열하에 도착하니 사방에서 조공행렬이 보이고 몽고,티베트, 이슬람 등 난생 처음 보는 종족과 동물 등을 보며 연암은 내 평생 열하에 있을 때만큼 진기한 것을 본적이 없다고 하였다. 8월 11일 드디어 대장정의 여정을 끝내고 청나라 황제 건륭제를 알현하게 되었다.
연암 박지원 선생은 청 문명과 문물을 보고 감동하고 감탄하면서 자신의 나라 조선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며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총 6권으로 된 열하일기는 정조시대 금서였으므로 이조 고문서실에 보관 할 수 없었고 박지원 선생의 후손들이 근 이백년 넘게 보관해 오다가 오늘날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조태자 / 엘리콧시티,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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