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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 전쟁의 참극

2022-04-20 (수) 우병은 / 스털링,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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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씨의 셋째 딸이신 우리 어머니는 여러 곳에서 혼담이 왔는데 다 거절하셨다. 비록 신랑의 아버지는 보부상으로 가난하시지만 큰아버지께서 한학을 하시고 막내 삼촌께선 신식 초등학교 나오셔서 공무원으로 계신다는 말에 시집오고 싶으셔서 3.1운동쯤에 결혼도 하시고 그때 예수를 믿었다고 하셨다.
옛날이라고 부모가 점지해주신 대로 결혼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보부상을 하신다니 가난한 줄이야 아셨지만 와보니 너무 없어서 산과 들에 다니면서 산채를 뜯어 밥으로 잡숫고 머리카락이 자라지 않아 손가락만한 꽁지머리였다고 하셨다. 4촌 시누이들은 제대로 잡숴 말꼬리 같은 머리였다고 하셨다.

그렇게 가난한 집을 일궈 논밭, 산을 사서 부잣집이라는 말을 듣고 사는데 밤마다 산 빨갱이가 내려와서 괴롭혀 목숨이 위태해지자 읍내에 집을 사서 이사를 갔다. 그때 내가 5살 어린이로 구경할 것도 많고 과자도 많은 장터에 나오면 안동여자중학교에 다니는 우리 누님처럼 교복 입은 여자가 버스가 올 때마다 있어 우리 누님을 만날 거라고 날마다 버스 정유소에 나갔다. 알고 보니 차장이었다.
이토록 가난한 집이 봉화 읍내에 집을 샀으니 회심의 기쁨이 얼마나 벅찼으랴? 안타깝게도 6.25전쟁에 불타고 아버지께서 우시는 걸 못봤는데 마음이 왜 안 아프셨을까! 어머니는 자주 우셨다.

남부여대해서 피난을 가는데 할아버지부터 온 가족이 동네 사람들과 함께 마을을 떠나 차가 다니는 큰길로 가면 안 좋으니까 안동군 녹전면 원천리 바우재를 지나 걸었다. 7월 무더위에 하루 이틀 걸으니 지쳐 모두가 집으로 가자고 했다. 송내(송천)라는 강을 앞에 두고 아버지를 제외한 온 가족이 울고 있어 왜 우는지 위에 형님에게 물었다.
“아버지만 피란 가고 우리 모두 집에 간다”고 해서 철없는 내가 소리 내어 울었다.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 우리 사이에 삼팔선이 있으면 안 된다”고 갈 때는 며칠 걸리던 길을 올 때는 하루 이틀 만에 집에 왔다. 와보니 공화국 지역 간부들이 날마다 논 많고 쌀 많은 집이라고 우리 집에서 점심과 저녁을 먹고 갔다.

평소에 까마귀만한 비행기가 큰 줄 몰랐는데 낮게 떠서 괭 소리를 토해 내면서 집채보다 더 큰 통체를 보이며 앞산을 넘어와 우리 집 지붕을 넘고 뒷산을 넘어가더니 10리 거리 읍내에 있는 우리 집을 폭격하고 말았다. 계급 높은 인민군이 타는 말이 마당에 있었다고 한다.
보부상 하던 가난한 집에서 살림을 일궈 읍내에 집을 마련한 건데 아버지 어머니께서 얼마나 비통하셨을까?
인민군은 쫓겨 갔고 미국 구호식을 보고 매일 와서 밥을 먹고 새끼 딸린 돼지를 잡아먹는 놈들에게 시달렸던 회한이 엄습하셨는지 어머니는 얼마나 우셨는지 모른다.

이러셨던 아버지, 어머니를 보아 왔던 내가 우크라이나의 눈물을 보고 같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우크라에 구호금을 보내려고 워싱턴에 있는 우크라 대사관 주소를 검색하니 실력 부족으로 서울에 있는 우크라 대사관 주소가 나왔다. 안절부절 하는 중에 한국일보에서 성금 거둔다고 해서 아내가 우편으로 보냈다.
미국과 자유세계는 우크라에서 로스케가 이기도록 하지는 않을 거다. 러시아가 지쳐서 제풀에 물러가야 전쟁이 끝날 것 같다. 우크라이나에 필요한 것은 기도와 지원이다.

<우병은 / 스털링,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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