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봄이 찾아 왔는지 불어오는 바람은 훈풍이요 실바람이다. 4월의 봄을 움트는 새싹만큼이나 기다렸던 양 봄 처녀의 마음이 되어 지겹던 마스크도 벗어 던진 채 숲속의 새소리를 멜로디 삼아 꽃구경하러 찾은 곳은 가까운 센테니얼 공원이다.
아지랑이 피는 깊고 넓은 호수가 눈앞에 펼쳐지면서 수많은 거위 떼들이 먹이를 찾아 물속에서 떴다 잠겼다 자맥질하는가 하면 어떤 녀석들은 날개로 힘차게 얼굴과 몸통을 수없이 때리며 그들만의 목욕을 즐긴다. 부지런하고 잽싼 녀석들은 이미 잔디 위로 올라와 뒤뚱거리며 코를 박고 풀을 뜯는데, 저만치 엄마 손을 잡고 봄 마중 나온 아가의 아장아장 걷는 발걸음이 어쩜 저리도 거위의 모양새와 닮아 있을까. 잔잔한 호수 위에는 햇살을 받아 은빛 물결이 보석처럼 빛나는 한켠으로는 바다인 양 착각한 듯 갈매기 떼들이 평화로운 한나절 공원의 정취를 그림처럼 수놓고 있다.
공원산책을 어느 입구에서부터 출발하든지 긴 호수를 따라 둥글게 돌아가는 공원의 구조상 산책이나 뜀박질을 하다 보면, 잠시 아픈 다리도 쉴 겸 그늘 속 안락한 벤치를 찾아 호흡을 고르며 땀을 닦는 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벤치의 주인공 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웨스트버지니아에서 온 멕코이 부부의 벤치가 나란히 잔디 밭 한 가운데 정답게 놓여있고, 두 그루의 화사한 벚꽃나무 아래 켜켜이 나지막하게 쌓아 올린 돌담 안에는 샛노란 수선화가 수줍은 듯 실바람에 살랑대며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1870년대 남북전쟁 직후 북군을 지지했던 멕코이 가문과 남군을 지지했던 헷드필드 두 가문은 이웃이면서도 서로 앙숙이 되어, 집안끼리 피 터지는 격한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던지 교과서에 기록될 만큼 유명한 일화이다. 지금까지도 그 후손들은 집안끼리 결혼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또 호수를 가로 질러 있는 또 다른 벤치가 눈길을 끈다. 이미 오랜 세월의 풍파에 시달려 칠이 벗겨지고 탈색된 어느 허름한 의자에 적힌 글귀이다: “사랑하는 우리 아들 엔토니 R, 롱고, 가장 아름다운 꽃은 가장 먼저 꺾여 진다, 엄마 아빠가.”
얼마나 이른 나이에 요절하였으면 출생, 사망 일자조차 기록하지 않았을까. 이따금 발을 멈추고 나무 그늘 속 벤치에 등을 대고 앉아 있노라면 얼굴도 모르는 이들의 가족 사랑과 가슴 뭉클한 사연들이 벤치마다 묻어있어 공연히 마음이 숙연해짐을 느낀다.
오가는 사람들을 보면 체형이나 걸음걸이로 단번에 한국인임을 직감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 수가 증가하는 추세인지 눈인사를 주고받을 때면 한국의 어느 하늘아래 산책이라도 나온 듯 착각할 만큼 그들이 반갑다. 이 공원에서는 소규모의 걷기대회가 때때로 열린다. 한때는 몇 년간 메릴랜드한인회 페스티벌이 이 공원에서 열려, 지역주민들까지 초대하여 넓은 잔디밭에 모여 앉아 각양각색의 수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한국음식을 나누고, 풍물패와 태권도를 포함한 전통 한국문화를 소개하기도 하였다.
공원을 걸어 나오니 한낮의 햇살아래 봄맞이 단장을 하느라 공원 구석구석에서 망치소리가 한적한 공원의 정적을 깨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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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순 우드스톡, M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