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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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미국 할머니

2022-04-14 (목) 박명희 / 전 한국학교 교사,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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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도 언젠가 노약자가 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밀려올 줄 몰랐다. 60세가 넘으면 온갖 안내 팜플릿이 우편으로, 이메일로, 전화로 날라온다.
슬기로운 은퇴계획, 세미나, 연금관리, 돈관리, 노인 주택단지, 전문병원, 건강식품, 신발, 의류, 생활용품, 식당, 눈치우기 잔디깎기도 맡기라고 나보다 내 나이를 먼저 알아내고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안내를 해준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슬기로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려고 계획을 세운다.
정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지만 그래도 나의 한표가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신념으로 나는 아주 작은 모임이라도 투표를 꼭한다. 65세가 되면 이중국적이 가능하다하니 언제 또 법이 바뀔지 모르니 우선은 한국여권을 만들어야겠다. 그리하여 다음 대통령 선거부터는 그동안 이곳 워싱턴 지역 동포들이 애써서 마련한 번듯한 애난데일 한인커뮤니티센터에서 재외 투표를 꼭 해야겠다.

미국 시민권 취득 후엔 한인봉사단체의 도움으로 정당에 등록을 하고나면, 주마다 카운티마다 다르지만 11월 선거날에 투표하라고 선거용지가 샘플과 함게 두툼하게 우편으로 날라온다. 대통령 후보를 제외하곤 내 맘대로 적당하게 투표를 하다가 몇년 전부터는 선거때면 한국어로 번역된 샘플을 신문에서 발견하고 고마움을 느끼며 선택의 폭이 조금은 넓어졌다.
그래도 주지사, 법관, 상하원, 카운티 군수, 보안관, 어떤 종류 사람을 몇 명까지 표시하라는데 누가 누군지 통 알 수가 없지만 후보자를 잘 모르면 아시안이나 익숙한 한국 성을 찾아서라도 꼭 찍는다. 왜냐하면 오바마 와 트럼프 대통령을 보면서 미국은 정말 위대하다고 느끼며 친정인 한국인에게 힘을 실어주어 언젠가 한국계 대통령을 바라는 마음으로 투표를 한다.

사회복지제도에서는 관절염으로 장애자 주차증을 받은 날 내 신세가 서글퍼서 대성통곡을 했지만 지금은 아주 잘 쓴다.
어디를 가도 날 데리고 가면 주차 걱정이 없으니 그 복잡한 워싱턴 DC 박물관과 슈나이더 성당에서도 편안히 주차하고 주교님도 만날 수 있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모든 것이 우는 아이에게 젖 준다고 자신의 권리를 찾아서 누려야겠다. 미국은 나중에 거짓이면 큰 벌을 받지만, 일단은 말로 해도 믿으니 커피, 식당, 입장료 모든 게 가만히 있으면 아무 혜택이 없다. 알아서 해주지만 신분증을 먼저 보여줘야 하는 한국과 다르다.
동네에 있는 미국 정부의 복지센터나 학교에서도 좋은 프로그램이 많다는데, 영어로 하니 재미가 없을 것 같고, 맛없는 점심도 먹고 싶지않다는 핑계로 포기하고, 한인교회나 성당, 한인회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는데, 배우고 싶은 건 많은데 강의내용이 다양하지 않고, 학기마다 계속 연결되는게 부족해서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배우는 걸 좋아해서 계획을 세우고, 배우고, 정리한 걸 글과 사진으로 남기고, 다음 계획을 세우는 게 좋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영어를 배우며 세운 계획은 영어로 싸움을 해서 이기기와, 영어로 꿈꾸고 일어나서 ‘오 마이 갓!’ 하고 소리 지르기였는데 이번 생에는 이루기가 어렵겠다.
그래도 얼마 전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한 손녀가 내 티셔츠에 쓰인 LOVE를 따라 읽은 내가 똑똑하다며, 자기 이름을 한글로 뒤집어 써놓고도 똑똑하다고 자랑하는 아이에게 슬기로운 미국 할머니로 나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박명희 / 전 한국학교 교사,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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