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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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이야기

2022-04-03 (일) 윤영순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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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변덕스런 봄 날씨가 계속되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활짝 개인 하늘아래 헐벗은 조팝나무에서 잎보다 먼저 핀 흰 꽃들이 햇살에 눈부시다. 미루었던 찬거리를 사기 위해 마트에 들러 이것저것 먹거리를 사다 보니 차 트렁크에 담긴 장바구니 수가 많아 오늘은 아파트 층계를 몇 번씩 오르내려야 할 것 같다.

이때 아래층에 사는 작은 사내아이가 우리를 언제 내려다 보았는지 맨발로 뛰어나와 일손을 거들어준다. 이 녀석의 친절이 몇 번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이는 도움을 준다는 것이 무척이나 신 나는 모양이다.

여러 세대, 여러 인종이 어울려 살고 있는 작은 인종 박람회장 같은 아파트에서 때로는 이 아이처럼 예상 밖의 친절을 통해서 평소에는 가까이서 접하지 못했던 이웃사람들의 삶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는 계기가 된 것 같다.


아래층에 살고 있는 두 흑인 가족의 경우를 보면 남자들은 아이들을 돌보며 주로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가 하면 여자들은 새벽같이 생활전선에 나가 생계를 꾸려가는 억척스런 모습이 몸에 배어있다. 마치 모계사회를 연상시키듯 여성들은 활동적이며 생활력이 강하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방과 후면 집밖에서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운동을 하거나 잡담으로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일까, 때로는 집안에서 엄마의 부재가 아이들의 교육과 인성발달에 영향을 주는지 어쩌는지, 행여나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이들 아이들에게 가난을 세습해 주는 것이 아닐런지….

요즈음 바이든 대통령이 최초의 흑인여성 대법관으로 지명된 커탄지 브라운 잭슨의 설왕설래 청문회 진풍경의 한 장면이다. 그녀는 청문회에서 상원의원들의 인격 모독성 발언을 차분하게 반박했다. 가사와 육아, 그리고 직장의 세 가지 일을 책임져야 하면서, 동시에 ‘완벽한 어머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흑인여성들의 고충을 남성들은 이해하지 못한다고 지적하며 불쾌감과 곤혹스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방청석은 숙연해지곤 하였다.

흑인여성의 삶을 대변해 주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브론즈빌의 세 자매(Three Girls from Bronzeville)’는 한때 시카고 트리뷴 기자였던 돈 터어너가 쓴 자서전적 흑인여성의 가족사이기도 하다. 주인공 돈은 일찍이 시카고 교외의 브론즈빌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 킴과, 특히 이웃집 친구 데브라와의 관계를 세 자매로 생각하며 자랐다.

그러나 여동생 킴은 자라면서 뒷골목의 부랑배와 눈이 맞아 임신했으나 이내 사산하고, 그 충격으로 마약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한편 이웃집 친구 데브라는 인디애나폴리스로 이사한 후 역시 마약에 중독되어 살인까지 저지르고 교도소에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주인공 돈은 어려운 환경을 꿋꿋이 이겨내고 집안에서는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한 후 신문사 기자로 발탁되어 마침내 저명한 소설가로 문단에 등단하게 된다.

이 책은 빈민층 흑인들의 삶을 단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중에도 특히 인상적인 내용은 언니인 돈이 막상 대학 기숙사로 떠날 때 동생 킴은 언니와의 헤어짐이 못내 섭섭하여 떠나는 언니를 보지 않으려 벽으로 얼굴을 돌린다던지, 아파트 이웃사람들이 몰려나와 그녀의 대학 입학이란 놀라운 경사에 다들 주머니에서 5불, 혹은 10불씩을 꺼내어 주인공 돈의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며 고향을 떠나는 그녀에게 “장차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큰 인물이 되어달라”고 간곡하게 당부하는 장면이다.

오바마 대통령 이후 전반적으로 눈에 띄게 흑인여성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다. CNN뉴스에서 맹활약을 하고 있는 젊은 여성 앵커인 흑진주 에비 필립이 그 대표적인 예로, 이들 여성들의 삶이 달라지고 있는 징표라고 할 것이다.

<윤영순 우드스톡,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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