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교회에서 반주를 시작하게 된 먼 이야기다. 한국동란이 나고 1.4후퇴로 식구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내려간 후 조그마한 교회의 주일학교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때 내 나이 11살, 몇 명 모이지 않는 주일학교에서 피난 내려온 아이들, 부산 토박이 아이들과 예배를 보았다. 주일학교 선생님들은 아주 친절하게 가르치셨다. 그 교회 앞쪽에 아주 조그마한 풍금이 놓여 있었는데 선생님 한 분이 그 풍금을 치시곤 했다.
그 풍금을 보면서 아주 신기하게 느꼈다. 재봉틀처럼 두 발을 양쪽으로 계속해서 움직이며 손가락으로 건반을 눌러보니 아름다운 소리가 나지 않는가. 너무도 신기해서 그것을 가끔 만지작거린 기억이 난다.
하루는 선생님이 “우리 주일학교 학생 중 피아노 칠 줄 아는 사람 있으면 손들어 봐" 라 하셨다. 그때 나는 기초 바이엘을 겨우 마친 정도였는데 손을 들었다. 선생님은 나를 쳐다보시며 “그래, 네가 해 봐"라 하시며 다음 주일에 부를 찬송을 미리 알려 주셨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연습해서 일요일마다 저 구석에 놓인 풍금을 치겠다고 용기를 냈다. 연습할 때마다 풍금을 양쪽발로 따로따로 누르면서 나오는 소리가 무척 신기하고 좋았다.
그 후 서울로 환도한 후 이화여자중학교 3학년 때, 성경 선생님이 들어와 “이 교실에서 피아노 치는 학생은 모두 손들어 봐" 하시니 여러 명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은 여러 명 중에 내게 반주를 맡으라 하셨다. 나보다 일찍 피아노를 배워서 꽤 잘 치는 애들이 많은데 왜 내게 그러셨나 의아했다. 이후 선생님이 시켜서 정동교회에서 중학교 예배가 있을 때면 늘 피아노 반주를 했다. 그 후 나는 이화고등학교 안에 있는 서울 예고에 입학했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서울에 있는 남산 감리교회의 정식 반주자가 되었다.
나의 교회 음악은 남산감리교회에서 많은 경험과 산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한국 종교음악의 원로이신 구두회 교수님(찬송가 559장, 사철에 봄바람 불어 잇고, 579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의 작곡자), 이유선 교수님(찬송가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597장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작곡자), 한인환 선생님 등 세 분이 번갈아 가면서 지휘를 하셨다. 그 세 분들의 신앙심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 분들이 성가대를 지휘 하실 때 종교음악에서 느낀 그때의 분위기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교회음악이 어떤 것인지, 예배순서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 그 교수님들의 교회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웠다.
한 번은 이화여자대학 음악제 때 5,000명이 들어가는 대강당에서 500명의 합창대(이대 & 연대)가 오케스트라 반주와 맞춰 합창할 때 한쪽 옆의 그랜드 피아노에서 피아노를 쳤다. 그때 내 마음은 구름에 붕 뜬 것 같았다. 음악이란 사람의 마음을 끌고 들어가는 묘한 힘이 있다. 천성문을 향할 때 천사들의 노래 소리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 큰 대강당을 흔들던 합창소리를 잊을 수 없고 지금까지도 내 마음속에 생생히 살아있다.
교회음악이란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야 한다. 교회의 피아노 오르간 반주자로 지낸 세월이 수십 년 흘렀지만 일요일 아침마다 피아노 앞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음악을 연주하며 하루를 시작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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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자 / 포토맥 문학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