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 담임목사(사진)
“6년 전 처음 와서 교회가 많이 망가졌기에 고치려고 했다. 교회 시설도 고치고 소리 지르고 싸우는 문화를 포함하여 이것저것 고치려고 했다. 교회 본질에 집중하기 위해 바닥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마음이었다.
반대가 심했다. 그래도 나는 고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교만이었다. 교회의 지난날을 함부로 판단한 큰 실수였다. 삶의 현실과 교회를 지켜내기 위해 교인들이 겪어내야 했던 아프고 어려웠던 마음과 상처들을 존중하지 않았다는 것에 큰 반성과 회개를 했다.”고 말하는 김정호 목사.
“오늘날 이민교회 가장 큰 문제는 영적인 이산가족의 현실이다. 큰 교회는 세대별로 목사가 따로 있고 별도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잘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오히려 작은 교회들이 모든 세대가 함께 예배를 드리며 영적으로 하나가 되기 쉽다. 코로나 사태는 우리 모두를 겸손하게 만들었다. 모든 세대가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하나가 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신앙공동체는 차세대와 연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한어예배에도 영어 번역 자막을 올린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영어목회자를 찾지 못해 계속 60중반의 나이든 담임목사가 영어설교를 한다는 것이 고생스럽기는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언어로 이산가족 되지 않는 교회가 되고 싶다.”고 바람을 말한다.
“플러싱은 영적인 갈망이 크고 선교적 필요가 높아 목회자에게는 할 일이 많아 신나는 곳이다. 코로나가 끝나면 교육선교센터에서 애프터 스쿨, 데이케어를 열어 지역 싱글맘들의 고민을 덜어주려고 선교위원회에서 준비하고 있다. 아이들은 배고프지 않아야 하고 청소년들은 꿈을 잃지 말아야 한다. 교회가 부모가 못하는 부분을 채워주기를 바란다.”
그가 도심지 목회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79년 보스턴 신학대학원에서 설교학을 공부하면서였다고 한다. 보스턴 지역 빈민문제에 관심을 가지면서 구조적 인종차별과 불공평, 불의에 대해 눈이 열렸다.
‘연합감리교 목사는 개교회에만 파송되는 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속한 지역사회에 파송된다’는 그는 신앙은 복음적이지만 실천은 변혁을 위한 진보적이어야 한다는 목회관을 가지고 있다.
김정호 소년은 부모님과 73년 미국 시카고로 이민 와 고등학교를 다녔다. 할아버지는 평양에서 목회 중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투옥됐다. 홀로 월남한 아버지는 시카고에서 목회를 하다 47세 젊은 나이에 추수감사주일 설교 강단에서 뇌출혈로 쓰러져 하나님 부름을 받았다.
김목사는 하나님을 원망하여 잠시 교회를 떠났지만 하나님을 떠나니 나만 손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신학대학원에 입학하고 일찍 목사가 되어 현재 41년차 목회를 하고 있다.
일리노이공대 화공학 학사, 보스턴신학대학원(M.Div), 시카고 신학대학원 (Th.M.)에서 공부했고 보스턴한인교회에서 부목사를 지냈다. 시카고에서 대학청년선교 17년간 목회 후 1997년 아틀랜타 한인교회로 파송, 18년간 목회하면서 대형교회로 부흥을 이루었다. 김목사는 연합감리교회 한인총회 총회장을 지내고 연합감리교회 평화위원회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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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임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