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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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허탈함에 갇히지 않도록

2021-10-19 (화) 이수진(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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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러시아 출장을 마치고 자투리 시간이 생겨 제일 유명하다는 서커스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빌딩 몇 층은 거뜬히 날아서 다닐 것 같은 단원부터, 태어나 처음 보는 호랑이와 곰의 합동 서커스까지 화려하지 않은 순간을 찾는 것이 빠를 정도로 모든 것이 완벽했지만, 정작 내 기억에 가장 많이 남아있는 건 서커스 단원들이 다음 무대를 준비하는 동안 광대 한 명이 무대로 올라와 홀로 관객들과 마주했던 짧은 시간이다.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입고 핀 조명을 받은 채 공연 중간에 나타나 약 오 분 간 관객들을 마주하는 그의 얼굴을 함께 상상해 보길. 상투적으로 하얗게 칠한 얼굴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입술, 크기가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검은 구두와 어울리지 않는 회색빛 곱슬머리. 그가 불뚝한 배를 풍선처럼 부풀리며 마이크 넘어 입을 열면 몇백 명이 앉아있는 큰 무대가 가득 채워지는 웅장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런 그가 무대를 휙 하고 휘젓기만 해도 관객들은 깔깔거렸다. 그가 객석을 눈으로 뒤적거리며 몇몇 사람들에게 농담을 던질 때는, 모두가 ‘저를 뽑아주세요!’라는 눈빛으로 그의 관심을 애타게 기다렸다. 그렇게 운 좋은 관객 중 최고의 한 사람은 무대로 내려와 그와 즉석 공연까지 함께 했다.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다 보면 어느새 다음 무대의 시작이었고, 관객들은 그의 퇴장을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심심한 공기를 구겨버리고 꺼질 것 같은 불씨를 훅 불어 살려내듯, 재미있는 공연 후에는 그보다 더 유쾌한 만남이 있었다. 내려앉은 온도를 다시 살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을 관객들은 그의 마지막 퇴장에 슈퍼히어로에 가까울 정도의 환호와 기립 박수를 보냈다.

무대가 화려할수록, 어쩔 수 없이 더 고요한 끝을 맺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며 얼마나 대단한 무대를 펼쳤든, 끝이 나면 아무도 없는 고요한 무대에서 갑자기 밀려오는 허탈함과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숙제가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 순간을 끝까지 버티지 못해 가버릴 때도 있고, 서커스에서 만난 고마운 슈퍼히어로처럼 누군가가 그사이를 잘 메꿔줄 때도 있다. 아니지, 오히려 내가 그 슈퍼히어로가 되어 누군가의 무대 사이를 심심치 않게 이어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되었든, 참 중요한 역할이 아닐 수 없다.

<이수진(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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