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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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보완과 공생의 삶

2021-10-14 (목) 장희은(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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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계획이 아직 없는 연구실 동료가 아이를 낳으면 대체 하루에 평균 몇 시간 들어가냐고 물어왔다. 정량적으로 환산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어 당황한 나는 기억을 더듬어 어림잡아 대답했다. 동료는 자기는 안되겠다고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고 가버렸다.

일터는 치열하다. 편안한 현상유지란 없다. 앞으로 나가거나 위로 올라가지 않으면 도태된다. 맞벌이로 일하며 손이 많이 가는 어린아이 둘을 키우려니 죽도 밥도 안되겠다는 생각이 여러번 들었다. 둘다 이도저도 아닐 바에는 한명이 커리어에 전념해서 소위 성공이란 걸 할 수 있도록 몰빵해서 밀어줘야 되지 않나 싶었던 때도 있다. 아이들도 너무 대충 키우는 것이 아닌가 불안해지기도 한다. 맞벌이 부모 아래 방치된 채로 팬데믹 일년 반 동안 온라인 교육만 받은 큰아이가 게임 중독 수준이 되어 있음을 뒤늦게 발견했을 때는 참담했다.

그래도 우리는 몰빵 대신 공생을 택했다. 아이를 하나만 낳거나 하나도 안낳았으면 훌륭한 논문을 서너개 더 썼을까. 한명이 전업이 되어 전폭적으로 지원해주었으면 다른 한명이 더 큰 성취를 이루고 더 그럴듯한 자리에 앉아 있을까. 가보지 않은 길이라 알 수 없지만, 이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우리가 서로 보완할 수 있다는 점에 감사한다. 미적 감각이라곤 도무지 없는 나 대신, 그림 솜씨가 좋은 남편이 틈틈이 아이들과 그림을 같이 그리기도 하고 아이들 미술 숙제를 도맡아서 도와준다. 막귀인 남편 대신 음악 숙제는 내가 봐준다. 남편은 내가 아는 그 어느 남자보다 집안일을 잘하고, 내가 몇 년 전 타주에 3주짜리 워크샵 펠로우로 선발되었을 때도 좋은 기회이니 꼭 가라며 떠밀었고, 휴가도 내지 않고 직장과 육아를 해냈다. 두 아이는 팬데믹 동안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고, 선물을 받아도 다른 한명이 오기 전까지 뜯지 않고 기다렸다가 꼭 같이 열어보는 기쁨을 나눈다. 우리 손길이 미처 미치지 못해도 아이들끼리 서로를 챙기고 서로를 키운다.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레스토랑에 앉아 외식을 하는데 뒤늦게 주문하지 않은 아이스크림이 나왔다. 아직 어린 작은아이가 자기 것을 먹다가 몰래 엄마 것을 하나 더 깜짝 주문한 것이었다. 그리 잘해주지도 못하는데 이만큼이나 사랑받는구나 싶어 코끝이 찡해졌다. 스푼 하나로 남편과 나누어 먹으며 생각했다. 넷이 함께 걸어가는 삶이 이렇게 꿀맛이구나.

<장희은(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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