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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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웃 보울 문을 열다

2021-05-18 (화)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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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기온이 차가웠고, 뚝뚝 떨어져 앉은 객석은 썰렁했다. 하지만 다들 흥분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이게 얼마만인가. 지난해 1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름시즌이 통째로 취소됐던 할리웃 보울이 마침내 문을 연 것이다.

지난 15일 토요일 밤, 구스타보 두다멜이 지휘하는 LA 필하모닉은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청중 앞에서 라이브콘서트를 열었다. 디즈니 홀에서 마지막 연주를 가진지 14개월만이다.

이날 음악회는 남가주의 의료진들을 초청해 무료로 베푸는 특별감사 연주회였다. 이 공연을 포함해 할리웃 보울은 6월29일까지 ‘최전선 헬스워커들’을 위해 5회의 무료음악회를 헌정한 후, 7월3일과 4일 독립기념일 불꽃놀이 연주회로 정규시즌을 시작한다.


“마치 부활한 것 같아요. 오늘 우리가 여기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여러분들 덕분입니다. 오늘은 여러분 모두를 위한 날입니다. 땡큐, 땡큐, 땡큐, 땡큐 베리마치, 무초 그라시아스!” 무대에 오른 두다멜의 감격에 찬 목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연주 프로그램은 현대작곡가 제시 몽고메리의 ‘스타버스트’(Starburst)와 사무엘 바버의 ‘현을 위한 아다지오’, 그리고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에로이카’였다.

우주에서 별빛이 작렬하듯 생기 넘치는 ‘스타버스트’를 시작으로, ‘현을 위한 아다지오’는 팬데믹 동안 숨져간 사람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이었고, ‘에로이카’는 의료현장을 지켜낸 영웅들을 축하하는 곡이었다. 또 앵콜로 두다멜은 번스타인의 짧은 왈츠 ‘디베르티멘토’를 들려주었다.

비감과 애수에 가득한 ‘현을 위한 아다지오’가 절정에 이르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건가, 그동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왜 58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어갔으며, 앞으로 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슬로모션처럼 지나가면서 깊은 슬픔과 함께 일종의 카타르시스가 찾아왔다. 음악이 주는 놀라운 공감과 정화를 경험한 시간이었다.

교향곡 역사상 가장 강렬하고 파격적이라고 평해지는 ‘영웅’ 교향곡은 그러나 제 역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했다. ‘거리두기’ 때문에 오케스트라 단원이 60여명으로 축소됐고, 이들조차 뚝뚝 떨어져 앉아서 연주했기 때문이다. 현악과 타악기 주자들은 마스크를 쓴 채 6피트 떨어져 연주했고, 마스크를 벗고 연주해야하는 목관과 금관주자들은 널찍이 12피트 거리를 두고 앉아서 연주했다. 당연히 사운드의 결집력이 떨어졌고, 음향도 위축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사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연주회보다 뜻 깊고 아름다운 콘서트였기 때문이다.

이날 초청된 청중은 약 4,000명, 수용인원(17,500명)의 20%가 조금 넘는 숫자다. 마치 객석이 거의 빈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한산했지만 그래도 참석자들은 연주회 내내 마스크를 착용하고 거리두기를 지켜달라는 요구를 충실히 따랐다. 티켓은 이메일로 날아온 디지털 티켓을 스마트폰에 다운로드해야 했고, 인쇄된 프로그램도 없었으며, 공연은 1시간 반 동안 인터미션 없이 진행되었다. 사람 간의 접촉을 최소화하려는 조치들인 듯했다.

6월15일 캘리포니아 주가 완전 정상화에 접어들면 객석도 80%까지는 수용할 수 있을 것이고, 오케스트라도 제 형태를 갖출 것이며, 1년 반 동안 잠들어있던 박스오피스, 식당 및 상점, 무대 프로덕션, 파킹 요원들이 깨어날 것이다. 음식과 와인 배스킷을 들고 온 가족들이 여기저기서 피크닉을 즐기는 모습도 보게 될 것이다.


할리웃 보울의 오픈 소식은 팬데믹에 지친 남가주 주민들에게 무엇보다 청량제 같은 기쁨이다. 보울은 우리에게 공연장 이상의 축제의 장이다. 본보가 매년 주최해온 ‘음악대축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할리웃 보울은 모두를 위한 페스티벌이요, 가족 친지, 이웃, 동창, 교우들과 부담없이 회동할 수 있는 만남의 광장이다. 여름철 도심의 숲속에서 별을 보며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특별한 곳이고, 클래식만이 아니라 재즈, 팝, 록, 레게, 뮤지컬, 영화음악까지 누구나 즐길 수 있는 공연이 여름 내내 펼쳐지는 곳이다.

2021 시즌에는 50여회의 공연이 예정돼있다. 예년의 70여개에 비해 줄어들긴 했지만 그것만 해도 얼마나 감사한가. 두다멜과 LA 필의 스테이지는 14회 예정돼있고, 스타 출연자로는 가수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H.E.R., 피아니스트 장 이브 티보데와 엘렌 그리모, 첼리스트 요-요 마와 셰쿠 카네 메이슨 등이 있다.

싱글 티켓 판매는 오늘(18일)부터 시작된다. 할리웃 보울에 입장하려면 백신접종을 마쳤거나 72시간 내 코비드 검사 음성결과를 증명해야 한다. 완전 정상화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숙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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