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오페라가 현재 절찬리에 공연 중인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주인공 로미오 역을 한인 테너 듀크 김이 노래한다. 지난 9월 시즌오픈 작 ‘나비부인’에서도 주인공 초초상 역을 소프라노 카라 손(손현경)이 맡았다.
LA오페라의 공연을 오랜 세월 관람해왔지만 한국인 가수가 주역인 오페라를 본 것도 처음이고, 잇달아 두 편이나 주인공으로 무대에 선 일도 처음이다. 이 무슨 경사인가! 게다가 두 사람 모두 호연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니 뿌듯하고 감사할 뿐이다.
샤를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LA오페라가 2005년과 2011년에 이어 세 번째 공연하는 작품이다. 2005년에는 당시 한창 떠오르던 테너 롤란도 비야손과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가 무대를 뜨겁게 달궜고, 2011년에는 남성미 넘쳐흐르는 비토리오 그리골로와 고혹적인 니노 마차이제가 출연해 열렬한 사랑을 노래했다.
13년 만에 오른 이번 공연은 듀크 김(Duke Kim)과 아미나 에드리스(Amina Edris)의 무대였다. 둘 다 비교적 신인이라 그처럼 스타 파워를 뽐내지는 못했지만 그 못지않게 순수하고 절절한 사랑의 비극을 노래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세상사람 모두가 아는 러브스토리의 원형이다. 십대들의 풋사랑이지만, 바로 그 때문에 아름답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랑에 빠져볼 수 있는 불멸의 명작이다.
이 희곡은 이탈리아 북부 도시 베로나에서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를 극화한 것이다. 덕분에 베로나 시는 그럴듯한 ‘줄리엣의 집’을 지어놓고 관광수입을 톡톡히 누리고 있으니, 여행사 패키지로 유럽관광을 하는 사람 중에 ‘줄리엣의 집’을 들르지 않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그 집에는 가슴이 반들반들해진 줄리엣 동상이 있고(만지면 사랑을 이룰 수 있다는 전설 때문에), 벽에는 각 나라말로 쓰인 사랑의 메시지가 가득하다. 가상의 세트인데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걸 보면 지고지순한 사랑에 대한 동경은 영원한 듯하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연극 영화 발레 회화 음악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가장 유명한 것이 프로코피에프의 발레이고, 베를리오즈의 극적 교향곡, 차이콥스키의 환상서곡, 그리고 번스타인의 뮤지컬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등 장르를 초월하여 수많은 작품이 탄생했다. 오페라만도 10개가 넘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 프랑스 낭만주의 작곡가 구노의 오페라다.
구노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탈리아 오페라와는 색채감이 많이 다르다. 프랑스 특유의 서정과 우아함, 로맨티시즘이 넘쳐흐르고 아리아, 듀엣, 앙상블이 고루 감미롭다. 구노는 원작에 없는 결혼식 장면을 추가하여 장엄한 독일 교회음악을 살짝 곁들였고, 엔딩에서는 줄리엣 무덤을 찾아온 약혼자 파리스 백작을 로미오가 죽이는 장면을 없애고 두 연인이 마지막 숨을 거두기 전 애끓는 이중창을 노래하게 함으로써 관객이 더 극적인 슬픔에 빠지게 했다. 원작에서는 두 사람이 살아서 만나지 못하고 서로 죽은 모습을 보고 자결하는 것으로 끝난다.
닷새 동안 다섯 번의 만남을 통해 뜨거운 사랑을 나누다가 집안의 반대로 이루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는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랑의 이중창들이 아름답다. 발랄한 무도회 장면, 열정적인 발코니 씬, 몰래 첫날밤을 치르고 헤어짐을 앞둔 안타깝고 격정적인 이중창, 그리고 무덤에서 숨을 거두며 서로의 마지막 손길과 키스를 갈구하는 피날레까지, 어느 하나 가슴을 흔들지 않는 장면이 없다.
당연히 이 오페라는 두 남녀 주인공의 뜨거운 호흡이 공연의 성패를 가른다. 노래는 물론이고 실감나는 연기가 중요한데, 내가 본 최고의 공연은 2007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로베르토 알라냐와 안나 네트렙코의 것으로 정말 연인들처럼 뜨겁게 사랑한 공연이었다. 이에 비해 듀크 김과 아미나 에드리스의 화학작용이 완벽했다고는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두 사람의 리허설 시간이 단 한 주밖에 없었다는 점, 또한 오페라에서 노래와 연기와 호흡은 공연이 거듭되면서 나아진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찬사를 보낼만한 공연이었다.
에드리스의 순진하면서도 열정적인 줄리엣도 인상적이지만, 듀크 김의 소년처럼 아름다운 미성은 특별한 것이었다. 많은 테너들이 고음에서 성대를 짜내는 발성을 하는데 비해 듀크 김은 힘들이지 않고 고난도 테크닉을 넘나드는 보기 드문 보이스의 소유자로, 향후 오페라 무대에서 많은 러브콜과 다양한 역할을 소화해낼 가능성을 보여준다. 다만 동안에다 왜소한 체격에서 오는 존재감 부족은 스테이지에서 극복해야할 과제가 될 것이다.
한편 이번 공연에서 주목했던 건 베네주엘라 출신 도밍고 힌도얀(Domingo Hindoyan)의 지휘였다. 영국 로열 리버풀 필하모닉의 지휘자이고 폴란드 국립라디오 심포니의 수석객원지휘자인 그는 처음 서는 LA무대에서 대단히 훌륭하고 인상적인 연주를 들려주었다. 프랑스 오페라의 풍요로움과 로맨틱한 열정을 정교하게 직조해내면서 특별히 극적 모멘트를 잘 살린 연주였다. 문득 2026년 은퇴하는 제임스 콘론 음악감독의 차기 후보들 중 한 사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은 14, 17, 20, 23일 4회 남아있는데 힌도얀은 14일과 17일 지휘하고, 20, 23일은 상주지휘자 리나 곤잘레스 그라나도스가 포디엄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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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