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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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는 물가

2021-05-18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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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물가는 항상 오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60년대말부터 80년대 초까지 높은 인플레가 10년 이상 계속됐기 때문이다. 한 때 연 15%에 달하던 인플레는 1980년 연방 준비제도 이사회(FRB)가 연방 금리를 20%까지 끌어올리고서야 진정됐다.

인플레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놓고 기업들이 가격을 올렸기 때문이라는 설부터 소비자들이 돈을 흥청망청 썼기 때문이라는 설, OPEC때문이라는 설 등이 분분했다. 하지만 이제는 인플레의 근본 원인은 통화량의 팽창이라는 게 정설로 굳어져 있다. 통화주의자 밀튼 프리드먼의 공의 크다. 70년대 물가가 오른 이유는 월남전과 존슨의 ‘위대한 사회’를 위한 복지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정부가 마구 돈을 찍어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 서양의 물가는 큰 변동이 없었다. 생산된 재화의 양과 유통되는 돈의 양이 균형을 맞췄기 때문이다. 이 균형이 깨진 것은 16세기 이후 신대륙의 금과 은이 스페인을 통해 유럽으로 유입되면서다. 스페인은 이 돈을 전쟁과 사치에 낭비하면서 오히려 국력은 쇠하고 국민들은 오르는 물가로 고통받았다.


19세기 초부터 말까지 100년 동안 미국의 물가는 점진적인 하락세를 보였다. 산업 발전과 함께 생산된 재화의 양이 화폐의 양을 능가했기 때문이다. 점진적인 물가의 하락은 생활 수준을 향상시킨다. 그러나 가격이 급속히 하락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매출이 준 기업들은 고용을 줄이거나 아예 문을 닫고 실업자가 된 근로자들의 구매력이 줄면서 물건은 더 팔리지 않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1930년대 미국이 그랬다. 1929년 주가 폭락과 함께 경기가 악화하자 불안해진 사람들은 은행으로 달려가 돈을 찾기 시작했고 갑자기 많은 돈을 마련할 수 없었던 많은 은행들은 도산했다. 이럴 때 ‘최후의 융자자’(the lender of the last resort) 가 돼 주어야 할 FRB는 자기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돈을 푸는 대신 통화량을 줄였다. 그 결과 1929년 2만5,000개에 달하던 은행 수는 1만개가 줄어들었고 미국 경제는 최악의 디플레와 대공황을 겪어야 했다. 2008년 금융 위기가 그 정도로 끝난 것은 이를 잘 알고 있던 벤 버냉키 당시 FRB의장이 연방 금리를 0%까지 내리고 사실상 무제한으로 돈을 풀어 자금 경색을 막았기 때문이다.

작년 3월 코로나 사태로 미국 경제가 위기에 처하자 FRB는 버냉키 플레이북을 다시 사용함으로써 이를 해결하려 했다. 금리는 다시 0%대로 내려갔고 천문학적 규모의 돈이 풀렸다. 과거 중앙 은행은 지폐를 찍어내는 방식으로 돈을 풀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연방 정부가 발행한 국채를 FRB가 매입하고 재무부 장부에 돈이 입금됐다는 기록만 남기면 된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셈이다.

FRB가 매달 1,200억 달러 규모의 국채를 사들이고 있는 와중에 바이든 행정부는 1조 9,000달러의 경기 부양안을 통과시켰다. 이런 조치에 힘입어 올 미국 경제는 7%가 넘는 성장을 이룩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러나 좋은 것도 지나치면 독이 된다. 위기 상황에서 돈을 푸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정도를 넘어서면 부작용이 생긴다. 인플레가 그것이다. 지난 4월 소비자 물가는 연율로 4.2% 상승했는데 이는 12년만에 최고치다.

FRB는 이는 일시적인 현상으로 걱정할 일 아니라는 입장이지만 로버트 카플란 달라스 연방 은행 총재는 금융 시장에 불균형이 발생하고 있다며 국채 매입량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도 금리 인상 필요성을 시사했다.

4월 소비자 물가가 급등한 것과 대조적으로 근로자 평균 임금은 1.2% 올랐다. 월급이 올라도 물가가 더오르면 사실상 임금이 깎인 것과 같다. 돈이 풀리면서 지난 1년간 미 주가는 40% 급등했지만 그 수혜자는 주식의 90%를 가지고 있는 상위 10%다. 그 달 번 돈 대부분을 생활비로 써야하는 대다수 미국인은 물가가 월급보다 많이 오르면 직접적인 타격을 입는다. 인플레가 오기 전 선제적 대응이 필요한 이유다.

장기 금리의 기준이 되는 10년 만기 연방 국채 수익률은 작년 0.5%에서 이미 1.7%를 넘나들고 있다. 아직도 0%대인 연방 금리는 역사적으로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다. 인플레 예방을 위한 금리 인상은 시간 문제로 보인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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