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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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의 나무를 가꾸는 마음 밭

2021-05-14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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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지애나의 주도인 배턴 루지에는 제시 해밀턴(74)이라는 흑인 할머니가 살고 있다. 지난달 3일 화창했던 토요일 오후, 할머니의 집 앞에서는 ‘제시 해밀턴 데이’라는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할머니의 74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중년남성 10여명이 가족들을 데리고 원근각처에서 모여들었다. 이들을 이어주는 끈은 30여년 전 한 솥밥을 먹은 인연.

“최저임금을 받으면서도 매일 그 뜨거운 주방에 웃음 가득한 얼굴로 들어가던 사람은 내가 아는 한 당신이 유일합니다. 그 고마움을 전하려고 우리가 왔습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존경합니다.” 깜짝 생일파티 진행자는 감정이 복받쳐 말을 잇지 못했다.

이제는 50대가 된 이들은 80~90년대 루이지애나 주립대(LSU)의 새파란 학생들이었다. 할머니는 이들이 속한 남학생클럽 기숙사의 조리사로 14년 동안 일했다. 매일 새벽 4시에 집을 나와 아침식사부터 점심, 저녁 각각 100명분을 만드는 고된 일이었는데, 정 많은 주방 아주머니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모두 내 아들”이라며 학생들을 자식처럼 보살폈다.


시험 스트레스, 여자친구와의 갈등 등 고민이 있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학생들은 으레 주방으로 향했다. 그는 들어주고 다독여주었다. “가진 것 없으면서도 한없이 내어주던 사람”이었던 그는 학생들에게 ‘어머니’였다. 어머니 같고 아들 같던 인연은 졸업 후에도 이어졌다.

‘제시 해밀턴 데이’를 주도한 것은 자동차딜러십 사장인 앤드루 퍼새오티(52)였다. 지난해 할머니에게 안부전화를 한 후 그는 밤잠을 설쳤다. 팬데믹 와중에 70대 노인이 모기지 납부하느라 공항 청소부로, 컨트리클럽 조리사로 투 잡을 뛰고 있다는 말에 가슴이 미어졌다.

혼자 세 자녀를 키운 할머니는 평생 일에 묻혀 살았지만 생활은 늘 빠듯했다. 60살에 처음 ‘내 집’을 장만하고 행복했던 것도 잠시, 모기지가 발목을 잡았다. 30년 상환이니 앞으로 16년, 90살까지 일해서 갚아야 할 처지였다.

앤드루는 전국의 클럽 형제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할머니의 모기지(잔액 4만5,000달러) 모금운동을 펼쳤다. 학창시절의 ‘어머니’를 잊지 않고 있던 91명이 선뜻 동참해 5만1,765달러가 모아졌다. 모기지 완납할 돈에 더해 6,675달러의 용돈, 푸짐한 생일상까지 받은 할머니는 너무 놀라서 쓰러질 뻔했다.

불교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가르친다. 500겁의 인연이 있어야 옷깃 한번 스치고, 1,000겁의 인연이 있어야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며, 한 동네에 살려면 5,000겁의 인연이 필요하다고 한다. 겁이란 100년에 한 번씩 흰 천으로 닦아서 사방 15km의 바위가 닳아 없어질 시간, 인간이 가늠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만큼 인연을 소중하게 대하라는 가르침이다.

인연이 우리의 의지 너머 신비한 힘으로 만남을 이끌어준다면, 그 인연을 씨앗삼아 관계의 나무를 키워내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마음 밭이 비옥할수록, 물과 양분을 정성껏 공급할수록 나무는 무럭무럭 잘 자라날 것이다.

세상에는 좋은 인연을 악연으로 끝내는 어리석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악연에서 선한 인연을 이끌어내는 지혜로운 이들도 있다.


미국에서 전 현직 대통령들 사이의 관계는 다양하다. 적대적인 경우, 우호적인 경우, 진짜 친구사이인 경우 등. 그런데 그중 신기한 관계로 꼽히는 것은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 사이다. 두 사람은 결코 좋은 인연으로 만나지 않았다. 1992년 대선 당시 이들은 원수처럼 싸웠다. 아버지뻘 현직 대통령에 맞선 46세의 클린턴은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라는 조롱조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부시를 ‘늙었다’고 깎아내렸고, 부시 역시 아칸소 출신 클린턴을 ‘얼뜨기’라고 부르며, 외교정책에 관해서 자신의 개만큼도 모른다고 비꼬았다. 그런 애송이에게 백악관을 빼앗겼으니 부시에게 클린턴은 악연이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10여년 후 이들은 아버지와 아들처럼 가까워졌다. 부시는 자신이 아마도 클린턴이 늘 결핍을 느꼈던 ‘아버지’ 존재일 거라고 말했고 클린턴도 부인하지 않았다. 이들이 가까워지도록 다리를 놓은 것은 아들 부시 대통령이었다. 2004년 연말 인도양 쓰나미로 대재앙이 발생했을 때 아들 부시는 이재민 돕기 미국 내 민간모금활동을 두 전직 대통령이 이끌도록 부탁했다.

이후 두 사람은 바버라 여사가 ‘기이한 커플’이라고 부를 정도로 절친이 되었다. 아버지 부시가 자존심을 접고 과거의 적을 따뜻하게 품어준 덕분이라고 클린턴은 말했다. 악연을 선하게 풀어냈으니 두 사람 모두에게 복이다.

어린이날, 어머니날(어버이날), 스승의 날, 부부의 날이 모인 5월은 인연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달이다. 7,000겁의 인연이 있어야 한 집에서 태어나고, 8,000겁의 인연이 있어야 부부로 맺어진다고 한다. 그 귀한 인연들에 우리는 그에 마땅한 정성을 쏟고 있는지, 너무 함부로 대하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하겠다. 관계의 나무들을 얼마나 튼실하게 잘 키워냈느냐가 결국 우리 인생의 성적표가 될 것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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