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으레 집에서 먹는 것이고 편지는 으레 손으로 쓰는 것이었다. 너무도 당연하니 따로 지칭하는 단어도 없었다. 지금은 그걸 ‘집밥’, ‘손편지’라고 부른다. 당연하던 게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되면서 신조어가 생겼다. ‘집~’ 혹은 ‘손~’이라는 말이 동반하는 따스하고 정겨운 느낌, 그 원초적 사람냄새로부터 우리 삶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한 지붕 아래 살면서 함께 밥을 먹는 사람들, 식구(食口)들이 더 이상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온 가족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는 가족식사가 가뭄에 콩 나듯 드문 일이 되었다. 관련 조사를 보면 지난 20년 사이 미국에서는 가족식사가 33% 줄었다. 매주 단 몇 번이라도 주기적으로 함께 식사하는 가족은 30%에 불과하다.
식구들이 밥을 같이 못 먹는 이유는 사회가 변했기 때문이다. 부부 맞벌이가 일반화하면서 엄마들이 직장 일을 하고, 이혼이 많아져 엄마/아빠가 혼자 아이들 키우며 생계 꾸리느라 시간 맞춰 함께 밥 먹기가 어렵다. 자영업 하는 이민1세 한인들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상황이다. 부부는 매일 밤늦게 귀가하고, 아이들은 방과 후 텅 빈 집에 돌아와 엄마가 해놓고 간 밥을 먹거나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운다. 가족식사는커녕 깨어있는 아이들 얼굴 보기도 힘든 아빠들이 많다.
가족 모두 함께 아침 먹고 하루 일과를 시작하고, 함께 저녁 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하던 평범한 일상은 많은 가정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가정의 풍경이 바뀌면서 희생된 것은 가족 간의 끈끈한 정. 탄탄해야 할 가족 유대감이 약해지면서 허기 진 마음밭들은 갈라지고 틀어진다. 가족관계가 불안하면 온갖 사회문제들이 뒤따른다.
식구가 함께 밥을 먹지 못하는 현실을 보다 못한 미국에서는 ‘전국 가족식사의 달’이 만들어졌다. 여름 휴가철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달, 바로 9월이 가족식사의 달이다. 2015년 한 비영리단체가 시작한 캠페인은 전국적 호응을 얻으며 하나의 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이 운동에 앞장 서는 가족 저녁식사 프로젝트(Family Dinner Project)의 앤 피셜 총무가 즐겨하는 조크가 있다. “가족들이 매일 함께 식사하면 내 사업은 망해요.” 그는 가정문제 전문 심리치료사이다. 원수처럼 틀어진 가족들에게 그는 우선 같이 식사하라고 권한다. 몇번 같이 식사하다보면 아무리 사이 나쁜 가족들도 감정이 누그러진다는 것이다.
가족식사의 이점은 첫째 몸에 좋다는 것이다. 집밥은 보통 좋은 재료들로 정성들여 조리하니 대부분 영양만점 건강식이다. 이런 음식이 입에 붙은 아이들은 자라서 집 떠난 후에도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하게 된다.
둘째, 정신건강에 대단히 좋다. 부모형제와 둘러앉아 밥을 먹으면서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안정되고 지적으로 발달한다. 10년간 진행된 한 연구에 따르면 가족이 같이 식사하는 가정의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에 비해 성격이 원만하고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뛰어나며, 학업성적도 좋다. 가족 간 유대감이 긴밀하니 사춘기 때 우울증, 불안증, 약물남용, 흡연, 임신 등의 위험이 낮고, 자존감과 회복력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는 밥상머리 교육. 부모 못지않게 아이들도 바빠서 온 가족이 대화할 기회는 식사 때가 거의 유일하다. 식탁에 주기적으로 둘러앉으면 부모는 말과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가치관과 전통을 가르칠 수가 있다. 아울러 음식은 아이들에게 문화적 민족적 정체성을 갖게 한다.
넷째. 가족들과 같이 먹는 음식은 오감에 깊이 각인돼 평생 존재의 닻이 된다. 살아가면서 지치고 좌절할 때 그 음식들을 통해 새 힘을 얻을 수가 있다.
일본 도쿄에서 서쪽으로 200마일 떨어진 곳에 도진보 절벽이 있다. 경치가 빼어나 많은 여행객들이 찾는 이곳은 자살 다발지역이기도 하다. 죽고 싶은 사람들이 이 절벽을 찾곤 한다. 70대 후반의 시게 유키오가 이들을 살리려고 나선 것은 2004년 봄이었다. 전직 경찰관인 그는 친구의 자살을 경험한 후 자살방지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매일 절벽 주변을 돌다가 자살할 듯한 사람을 보면 그는 말을 걸고 사무실로 데려간다. 그리고는 전가의 보도를 쓴다. 절망에 찬 가슴 속에 삶의 의지를 되살리는 병기, 바로 음식이다.
그는 따뜻한 차와 오로시 모치(무즙 얹은 찹쌀떡)를 대접한다. 일본에서 정월 초하루에 먹는 음식이다. 찹쌀떡을 먹으며 그들은 어린 시절과 부모형제, 고향을 떠올리고, 눈물을 흘리고, 마침내 살기로 결심한다. 음식이 갖는 신비로운 힘이다.
“… 둥글게 둥글게 제비새끼처럼 앉아/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밥숟가락 높이 들고/ 골고루 나눠주시는 고기반찬 착하게 받아먹고 싶다 …… 이제는 돌아가 어머니의 둥근 두레판에 앉고 싶다 …”(정일근,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 중)라며 그들은 고향으로 향할 것이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은 명심하기 바란다. 아이들이 영원히 같이 살며 같이 밥을 먹는 게 아니다. 17~18살에 대학 가고나면 대부분 독립한다. 같이 사는 동안 되도록 같이 밥을 먹으며 부모와 자식 간에 탯줄 같이 탄탄한 연결의 줄을 만들어 놓아야 남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집밥’은 만드는 사람과 먹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식구들이 함께 만들고 같이 먹어야 더 맛있고 더 정겹다. 며칠 후 29일은 추석. 다 같이 둘러 앉아 송편 빚기 좋은 때다.
<
권정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