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혼란의 수렁에 빠진 공화당

2023-10-06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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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는 살점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는 괴이한 내용이 나온다. 젊은 상인 안토니오는 친구로부터 돈을 빌려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부유한 상속녀와 결혼하고 싶은 데 자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당장 수중에 돈이 없는 그는 평소 혐오하던 유대인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을 찾아간다. 안토니오가 자신을 경멸하는 걸 잘 아는 그는 이를 앙갚음의 기회로 삼는다. 기한 내에 원금을 갚지 못하면 그의 가슴에서 살 1파운드를 잘라내겠다는 조건을 달았다. 일종의 신체포기 요구이다.

셰익스피어는 당시 유럽사회에 널리 퍼진 유대인혐오를 양념삼아 코믹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렇다고 교훈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당장의 이익에 집착하다 보면 훨씬 중요한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그런 일이 케빈 매카시 연방하원의장에게 일어났다.

공화당의 매카시 의원이 당내 반란군에 내몰려 지난 3일 하원의장 자리에서 쫓겨났다. 하원은 마비상태이고 공화당은 대혼란의 수렁에 빠졌다. 연방정부 폐쇄 위기를 가까스로 몇주 늦춘 상황에서 하원이 기능을 못하면 나라살림은 어떻게 될 건지, 정국은 얼마나 혼란스러워질 건지 앞날을 예측하기 어렵다. 그런데 매카시 축출과 그에 이은 혼란은 사실상 예견되어온 사태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소수 말썽꾼들의 분탕질로 공화당이 망가지고 쪼개지며 아수라장이 되고 있다.


연방하원의장은 권력 서열 3위의 막강한 자리이다. 중가주 베이커스 필드 출신의 매카시는 2006년 하원의원이 되고부터 오로지 그 자리를 바라보며 달려왔다. 지난 1월 3일 118대 의회가 개회하면서 그의 꿈은 이뤄지는 듯했다. 공화당이 하원 다수당이고 그가 원내대표이니 의장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었다. 의장 선출투표라는 요식행위를 거쳐 다수당 대표가 의장이 되는 건 관행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이변이 생겼다. 하원 공화당내 초강경 극우집단인 프리덤 코커스 멤버들이 트집을 잡으면서 의장선출 투표는 장장 나흘에 걸쳐 15번이나 반복되었다. 그 과정에서 매카시는 이들을 달래느라 양보와 타협을 거듭하며 의장의 권한을 깎아냈다. 급전에 눈이 어두워 제 살을 뭉텅뭉텅 도려낸 것이다. 결국 의사봉을 거머쥐는 데 성공은 했지만 팔다리 다 묶인 그가 의장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 지는 당시부터 우려로 떠올랐다.

특히 불안했던 건 의장해임 규정 완화. 공화당 의원 과반의 동의를 요하던 불신임결의안 발의를 단 한명이 할 수 있도록 바꿨다. 그것이 이번에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프리덤 코커스의 리더격인 맷 게이츠 의원이 2일 불신임안을 발의하고 다음날 표결에 붙여지면서 매카시는 하원 정상에서 떨어졌다. 연방의회 234년 역사상 회기 중간에 하원의장이 해임되는 초유의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온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극으로 치달아온 공화당 분위기. 이 나라의 주인자리를 소수인종들에게 빼앗기는 듯한 극우 백인들의 위기감, 이를 부추긴 소셜미디어와 극우 방송인들, 그리고 이들의 구세주격인 도널드 트럼프 등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공화당은 강경극우 세력의 온상이 되었다. 오바마는 케냐 태생, 2020 대선은 사기, 지구온난화는 거짓말 등 근거 없는 주장들이 판을 치더니 급기야 트럼프 지지자들이 연방의사당을 쳐들어가는 폭거까지 일어났다. 2015년 결성된 프리덤 코커스는 공화당 지도부에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목안의 가시였다. 이들의 트집과 불신임 협박에 2015년 존 베이너 당시 하원의장이 사임했고, 후임 폴 라이언 의장은 아예 의원직 자체를 접었다. 맥카시는 지난달 말 연방정부 폐쇄를 막느라 민주당과 협력한 것이 결정적으로 이들에게 해임안 발의 빌미를 제공했다.

둘째는 다수당으로서 너무 약한 하원 공화당의 입지이다. 현재 433명의 의원들 중 공화당은 221명, 민주당은 212명. 공화당이 불과 9석 우위이니 30명 남짓 프리덤 코커스 멤버들이 얼마든지 어깃장을 놓을 수 있는 구도이다. 이번 의장 해임안도 게이츠 등 불과 8명의 공화당 의원들이 민주당과 함께 찬성표를 던지면서 가결되었다.

셋째는 매카시의 일관성 없는 태도. 필생의 숙원이었던 의장직에서 단 9개월 만에 쫓겨난 비극은 그가 자초한 측면이 있다. 그는 카리스마 있는 정치인은 아니다. 두루 두루 잘 하면서 사람을 모으는 타입이다. 특히 기금모금에 탁월해서 선거 때마다 전국을 다니며 자당 후보들을 응원하고 자금을 지원하며 입지를 다져왔다. 그러다 보니 열심이라는 칭찬을 받기도 하고, 너무 타산적이고 일구이언한다는 비판도 받는다. 당내 강경파들은 그가 민주당과 너무 쉽게 타협한다고 비난하는 반면, 민주당은 강경파 달래느라 바이든 탄핵조사를 명령한 그를 곱게 볼 리가 없다. 민주당이 해임안에 대해 찬성을 당론으로 정한 배경이다.

하원이 제 기능을 하려면 새 의장 선출이 급선무이다. 하지만 누가 의장이 되든지 다시 또 해임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공화당은 대청소가 필요하다. 극단주의자들을 몰아내고 혼란의 수렁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공화당의 앞날도, 미국의 민주주의도 위태롭다. 상원공화당이 건재한 것은 그나마 다행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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