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한지 100일이 조금 넘었다. 그동안 미국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국내외를 둘러싼 각종 정책은 물론이고, 미국인들의 삶 또한 크게 달라졌다. 통 큰 경기부양책으로 민생이 많이 풀렸고, 전격적인 코비드-19 백신공급 덕분에 정상화가 코앞에 와있다. 무엇보다 트럼프의 폭풍 트윗이 사라져 밤에 잠을 푹 잘 수 있게 됐다는 사람들이 많다.
또 하나 흥미로운 변화가 있었다. 백악관 집무실의 장식이 싹 바뀐 것이다. 물론 대통령 가족이 백악관에 입성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 중의 하나가 집무공간과 공공장소, 주거공간의 미술품을 바꿔 거는 일이다. 전시된 작품들은 대통령의 가치관과 역사관을 상징하기 때문에 어떤 그림을 거느냐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곤 한다.
가장 확실한 메시지는 역대 대통령 초상화들 가운데 누구를 어디에 거느냐를 통해 극명하게 표현된다. 지난주 뉴욕타임스는 바이든의 오벌 오피스에 걸린 초상화 사진들을 보여주었는데, 트럼프는 물론 이전의 많은 대통령과도 확연하게 다른 선택이었다고 평했다.
첫째로 바이든은 가장 중요한 위치인 벽난로 바로 위에 프랭클린 루즈벨트(F.D.R.)의 초상을 걸었다. 벽난로 주변은 대통령이 앉아서 회의하는 사진이 자주 언론에 등장하는 공간으로, 벽난로 위는 오랫동안 조지 워싱턴의 자리였다. 바이든 이전 대통령 9명이 모두 여기에 초대 대통령의 초상을 모셨다.
그런데 바이든이 과감하게 국부를 밀어내고 루즈벨트를 건 이유는 자신이 그를 모델삼아 야심찬 정책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1933년 대공황기에 취임한 F.D.R.이 과감한 뉴딜정책으로 위기를 타개했던 것처럼, 바이든 역시 취임 즉시 1조9,000억 달러의 코비드 구호정책과 2조 달러의 인프라계획을 내놓으며 재난 돌파를 시도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F.D.R. 초상화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워싱턴과 링컨을, 오른쪽에는 토마스 제퍼슨과 알렉산더 해밀턴을 배치했는데, 이는 이제껏 벽난로 주변에 걸린 가장 많은 초상화 숫자다. 아울러 집무실 다른 쪽 벽에서는 트럼프가 존경하는 백인우월주의자 대통령 앤드류 잭슨의 초상을 떼어냈고, 그 자리에 과학과 이성을 상징하는 계몽사상가 벤자민 프랭클린을 걸었다.
또 바이든의 집무실에는 7인의 흉상이 놓여있는데 이 역시 과거 어느 대통령보다 많은 것이다. 해리 트루먼, 로자 팍스, 마틴 루터 킹, 로버트 케네디, 링컨, 엘리노어 루즈벨트, 세자르 차베스가 그들로, 여성, 유색인종, 노동운동가의 흉상이 집무실에 전시된 것은 처음이다.
초상화들 외에 집무실에 걸린 미술품은 1917년 차일드 하삼이 성조기를 그린 작품(‘Avenue in the Rain’)이 유일하다. 이 그림은 오바마와 클린턴 정부 때도 집무실에 걸려있었다.
바이든 가족이 만찬룸과 홀, 복도, 주거공간에 어떤 그림들을 걸었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부시(아들) 대통령 가족은 인상주의 회화를 비롯한 풍경화를 좋아했고, 오바마 가족은 훨씬 현대적인 미술품을 다이닝룸과 복도 등의 가족 공간에 걸었다고 한다.
로라 부시 여사는 대통령 만찬룸에 조지아 오키프의 작품을 장식했고, 미셸 오바마 여사는 흑인 여성작가 알마 토마스의 ‘부활’을 그린 룸에 걸었다. 또 오바마의 집무실에는 위트니 뮤지엄에서 대여한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2점이 걸려있었다.
백악관에 걸리는 그림은 대부분 여러 뮤지엄에서 대여해온다. 백악관 자체 컬렉션도 있지만 대통령은 미국 내 거의 모든 뮤지엄에서 원하는 작품을 빌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1945년 이후 수많은 뮤지엄이 백악관에 다양한 작품을 대여해주었고, 스미소니언 자료에 의하면 현재도 수십점이 백악관, 의회, 대법원에 나가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트럼프 행정부 때는 단 한 점도 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보통 새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면 곧바로 워싱턴의 내셔널 갤러리와 스미소니언 박물관 등지에 여러 점의 미술품 대여의뢰가 오곤 하는데 트럼프 부부는 취임한 지 1년이 넘도록 아무런 요청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아트에 관심 없었던 트럼프는 그러다가 1년반이 넘은 시점에서 엉뚱하게 구겐하임 미술관에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아를의 눈 덮인 풍경’)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가 거부당해 국제적인 망신을 당했다.
백악관에 전시되는 그림은 미국의 정신을 구현하거나 역사적 의미가 있는 미국작가의 작품들인데 느닷없이 고흐라니, 물론 너무나 유명한 화가이지만 백악관이라는 공간적 맥락에 비추어볼 때 황당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 낸시 스펙터는 그 대신 화제의 설치작 ‘황금변기’를 가져가라고 역제안, 트럼프의 무개념에 일격을 가했다. 이탈리아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이 만든 ‘황금변기’는 미국의 막대한 빈부격차와 경제 불평등을 조롱하는 작품, 그녀의 신랄한 위트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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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