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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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의 애국

2021-04-30 (금)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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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토마스 모어(1478~1535)는 당시 영국의 비참한 현실을 비판했다. 저서 ‘유토피아’에서 그는 1인칭 화자를 통해 말했다. “그렇게도 순하고 많이 먹지도 않던 양들이 지금은 너무나 탐욕스럽고 사나워져서 사람들을 마구 잡아먹는답니다. 밭이며 집이며 마을까지 약탈해 작살을 냅니다.”

초식동물인 양이 갑자기 식인 동물로 바뀌었을 리는 없었다. 사람을 잡아먹는 주체는 양을 앞세운 지주들, 그들의 탐욕이었다.

16세기 영국은 모직공업이 번창하면서 양모 값이 폭등했다. 영국산 모직이 수출품으로 인기를 끈 덕분이었다. 잉글랜드의 습한 기후가 양 방목에 적합한 데다 100명이 농사짓던 땅을 목초지로 바꾸면 양치기 한명에 개 한 마리면 되니 인건비 절약되고, 양모는 금값이니 지주들에게 이런 노다지가 없었다. 농민/농노들은 하루아침에 쫓겨나고 집도 생업도 없는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구걸 아니면 도둑질. 구걸하다 잡히면 태형, 도둑질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대지주인 귀족, ‘젠트리’라고 불리는 소지주 등 땅 가진 극소수는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부를 일구고, 일하고 싶어도 일할 데 없는 대다수 민중은 가난과 수탈로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사는 부조리가 자본주의 초기, 당대의 현실이었다.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살 수는 없을까 - 모어는 고심했다. 그 상상의 결과물이 이상향 ‘유토피아’였다. 유토피아라는 섬에서 주민들은 다 같이 하루 6시간 노동하고, 모든 것을 공유한다. 사유재산도 화폐도 없어서 더 가지려고 싸울 일도, 돈 없어 고통 받을 일도 없다. 그래서 모두가 행복한 나라로 모어는 ‘유토피아’를 묘사했다.

‘Utopia’는 그가 그리스어 ‘ou(없는)’와 ‘topos(장소)’를 합쳐서 만든 신조어. ‘어디에도 없는 곳’이라는 의미다. 한편 ‘ou’ 대신 ‘eu(좋은)’로 해석하면 ‘세상에 좋은 곳’이 된다.

모어가 이상향을 꿈꾸던 때로부터 500년, 우리는 그런 행복의 나라는 없다는 사실의 산증인들이다. 후기자본주의 시대인 지금, 화폐가 사라지기는커녕 가상화폐까지 기승을 부리고, 사유재산의 빈익빈 부익부는 극에 달했다. 신자유주의의 무한경쟁, 세계화, 과학기술 혁명을 특징 삼는 이 시대에 극소수 부자들의 재산은 천문학적으로 늘고, 중산층은 수입이 쪼그라들어 줄줄이 빈곤층으로 떨어지고 있다. 기계가, 컴퓨터가, 인공지능이 양을 대신해 사람들을 잡아먹었다.

상황은 1년 여 팬데믹으로 더욱 악화했다. 코비드 피해서 공기 맑고 사람 없는 곳으로 이주한 부자들은 재산이 오히려 늘고(억만장자 총 자산가치는 코비드 이전에 비해 40% 증가), 감염위험에도 불구하고 생업현장에 나가야 먹고살 수 있는 서민들은 하루하루가 곡예다. 혹시라도 감염되면, 혹시라도 봉급체크 한번 못 받으면 그 순간 추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부상하는 것이 유토피아 식 사회주의 아이디어다. 국가가 국민에게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준다면 사회가 보다 자유롭고 평등해지리라는 구상, 바로 기본소득 제도다. 스위스, 핀란드 등 여러 국가들이 논의/실험했고, 미국에서도 각 지방정부 단위로 단기적 실험을 했던 이 제도를 현재 캘리포니아 주의회가 연구 중이다. 저소득층 대상 월 1,000달러의 현금을 지급하는 기본소득 법안이 주하원 세입위를 통과했다.

기본소득에 대해서는 찬반대립이 첨예하다. 공짜 돈을 주면 일을 안 한다는 주장, 생계걱정을 덜면 원하는 일에 전념함으로써 보다 의욕적 삶이 가능하다는 주장 등이다. 가장 근본적 문제는 재원확보. 세금을 올려야 하니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가 어렵다. 2016년 스위스에서 실시된 관련 국민투표도 압도적 반대(77%)로 끝났다.


그렇다면 돈이 넘치게 많은 사람들이 돈을 대면 어떨까. 부유세를 포함, 기꺼이 세금을 많이 내겠다는 수퍼 리치들이 있다. 2010년 결성된 ‘애국적 백만장자(The Patriotic Millionaires)’라는 그룹이다.

‘애국 ~’의 핵심멤버인 에비게일 디즈니(61)는 팬데믹 이후 “불공평의 정도가 너무 심해서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지경”이라고 말한다. 1923년 동생과 월트 디즈니사를 공동 설립한 로이 디즈니의 손녀인 그는 20대가 되면서 “돈이 내 인생을 망치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그가 한 일은 돈을 밖으로 퍼 나르는 것. 이제까지 7,200만 달러를 자선단체들에 기부했다.

그는 수퍼 리치들의 개인적 자선사업에는 한계가 있다고 말한다. 부유세를 걷어서 정부가 체계적으로 교육, 의료, 복지 등 공공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 ‘애국 ~’ 회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대상은 순 자산 5,000만 달러 이상 부자들. 이들에게 연간 부유세 2%만 부과해도 예상 세수는 4조 달러. 미국 공립교육 시스템을 완전히 개혁할 수 있는 액수다.

세금 많이 내서 애국하겠다는 수퍼 리치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까. 지금은 소수인 이들이 못 가진 계층을 배려하며 소유를 덜어내는 공생의 본을 보인다면, 선한 영향력이 다른 부자들에게도 파급되지 않을까. 모어의 ‘유토피아’ 만큼이나 아득한 상상을 해본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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