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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의 선택

2021-04-23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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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남미에서 가장 부유했던 나라 베네수엘라가 지금은 시리아, 아프가니스탄, 남 수단 등과 함께 세계 최대의 난민 수출국 중 한 곳이 됐다. 수 백만명이 떠나는 바람에 인구 3,000만명이 넘던 나라가 2,000만명 대로 내려 앉았다.

세계 최대의 석유 매장국가로 가난하려고 해도 가난하기 힘든 나라로 꼽히던 베네수엘라는 석유 축복이 저주로 바뀐 대표적인 나라다. 오직 석유 수출에만 의존하던 산업구조에 유가하락 사태가 덮치자 좌파 정권의 과도한 무상복지에 익숙해 있던 나라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남미 특유의 정치적 부패와 극심한 소득 불평등이 불러온 취약한 사회구조도 몰락을 부채질했다.

경제는 파탄나고, 한 나라에 대통령이 둘일 정도로 정세도 불안해지자 6년전부터 베네수엘라 탈출은 본격화됐다. 만일 이 나라가 지정학적으로 파나마 운하 북쪽, 중미에 있었다면 미국과 멕시코 국경은 베네수엘라에서부터 시작된 캐러밴으로 넘쳐 났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까지는 우선 카리브해에 막혀 있으니 많은 베네수엘라 난민들은 남미 루트를 택했다. 서쪽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나라 콜롬비아부터 넘어간 것이다. 일부는 콜롬비아를 거쳐 인접국인 에콰도르와 페루, 더 남쪽으로 칠레와 아르헨티나까지 내려가기도 했으나 많은 수는 콜롬비아에 자리를 잡았다.

국경을 닫아 걸기에 바빴던 남미의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난민 유입을 규제하지 않았던 콜롬비아에는 170만명의 베네수엘라 인들이 터를 잡았다. 난민 수용소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어디서나 짐을 풀면 거기가 새로운 삶의 터전이었다. 물론 서류미비자들로 대부분 변변한 신분 증명서조차 없었다. 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콜롬비아 정부는 우선 70만명의 베네수엘라 인들에게 2년 만기의 노동허가증을 발부했다. 이 정도로는 어림이 없었다. 최근 새로운 조처를 발표했다. 베네수엘라 난민 100만명에게 더 10년간 취업, 의료, 교육,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기로 한 것이다. 이 혜택은 앞으로 2년내 도착하는 신규 난민에게도 제공된다.

콜롬비아라고 형편이 특별히 나을 것도 없다. 두 나라 모두 미국서는 여행을 권하지 않는 치안 위험국들. 마약 카르텔의 준동으로 악명 높은 콜롬비아도 지난 1990년대부터 내전으로 5,000만명의 인구중 800만명이 거주지를 옮겨야 할 정도로 국내 상황이 어려웠다. 이들중 최소 100만명은 당시 더 안전하고 취업기회도 많았던 이웃나라 베네수엘라로 이주했다.

콜롬비아는 베네수엘라 경제가 내리막길로 질주하던 지난 2016년에야 최대 반군그룹인 FARC와 평화협약을 맺고 내전이 종식됐다. 그래도 지난해에만 7만명 이상의 주민이 게릴라와 마약 카르텔 세력 때문에 타지역으로 이주해야 했을 정도로 불안한 정세는 이어지고 있다.

이런 콜롬비아가 베네수엘라 인들에게 합법적인 거주를 허락한 것은 동병상련의 처지 외에, 뾰족한 현실적인 대안도 없었기 때문이다. 난민은 늘고 있는데 이들을 언제까지 법의 바깥에 방치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오랫동안 계속된 불안정한 정세 때문에 난민과 세계 식량프로그램을 위한 유엔 고등 판무관실이 콜롬비아에서 지난 수 십년간 활동해 왔다는 점이다. 유엔과 국제 난민기구는 그동안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70개가 넘는 비정부 기관들을 이끌며 베네수엘라 이주민들의 콜롬비아 정착을 지원하고 있다.

부자 집에서 받아 주지 않으면 차라리 없는 집끼리 서로 돕고 사는 것이 더 마음 편할 지도 모르겠다. 콜롬비아의 경제 사정도 주변 국가에 비해 크게 나은 것이 아니다. ‘콜롬비아의 선택’에 국제사회의 지원이 절실하다고 난민 구호기관에서는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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