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우리를 망쳐 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이다. 이 소설은 의미심장한 첫 문장으로 독자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다. 2017년 전미 도서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각종 외신이 ‘올해의 책’으로 꼽으며 미국 출판계를 뒤흔들었던 이 소설은 4대에 걸친 재일교포의 삶을 역사적 배경과 함께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저자 이민진은 7살 때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온 재미 한인으로 내국인이면서 끝내 이방인일 수 밖에 없었던 재일교포의 처절한 삶을 동일한 이민자의 시선에서 써내려 갔다. 저자는 민족성의 이유로 친구들에게 혐오를 받고 끝내 스스로 숨진 재일교포 중학생 소년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아 소설 집필을 결심하게 됐다고 밝혔다. 소년은 같은 반 친구들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너에게서 김치 냄새가 난다’ 등의 비난을 받았다.
소년이 마주해야 했던 멸시와 차별은 미주 한인 이민자들을 비롯해 아시안들에게 익숙한 일이다. 1871년 LA 중국인 대학살, 1882년 중국인 배척법, 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계 미국인 강제 수용소 수용, 1992년 LA 폭동, 애틀란타 총격사건에 이르기까지 미국 내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아시안을 향한 증오가 이어져오고 있다.
미주 한인이민 역사가 올해로 118주년을 맞이한 가운데 여전히 곳곳에서 한인들은 인종차별과 증오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있다. 애틀란타 총격사건의 아시안 피해자 6명 중 4명이 한인 여성이었고, 지난달 오렌지카운티의 실버타운인 ‘실비치 레저월드’에서 세상을 떠난 한인 유가족에게 ‘이 나라를 떠나라’는 증오 내용이 담긴 익명의 편지가 배달된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에 지난달 27일 LA 한인타운 올림픽 블러버드에서는 ‘아시안 증오를 멈춰라’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구호가 퍼져나가며 아시안 증오범죄 규탄 시위가 열렸다. 시위에는 한인은 물론 타 아시아계와 흑인, 라티노 등 범 커뮤니티가 참여해 인종차별과 증오범죄 근절을 위한 단합된 의지를 강력하게 보여줬다.
저자는 ‘파친코’ 소설 첫 문장에 책의 주제가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역사가 때때로 우리를 좌절시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고. 미주 한인들은 코로나19 사태 속 아시안 증오범죄가 번번이 일어나는 부당한 역사의 현장에서 현재진행형으로 살아가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기 위해 ‘그래도 상관없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침묵하지 않고, 꿋꿋하게 차별에 맞서 연대하며 나아가는 것, 그게 우리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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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인희 사회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