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전기차 포비아’, 완성차 업체가 해소해야

2024-09-04 (수) 박홍용 편집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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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일을 한지 3개월차를 맞이했다. 이를 위해 미국으로 오기 한달 전 아끼던 전기차를 중고거래 업체를 통해 팔았다. 결론부터 말하면 원하던 가격에 팔지 못했다. 1만8,000마일도 타지 않은 사실상 새 차였는데 제값을 받지 못했다는 생각에 며칠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외관도 멀쩡한 전기차가 중고거래 시장에서 저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를 찾기 위해 기사를 검색했다.

아직은 부족한 충전 인프라와 내연기관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긴 충전시간, 화재 우려 등 때문에 소비자들로부터 외면 받는 이른바 ‘전기차 캐즘(Chasm·일시적 수요 둔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는 기사가 온라인을 도배하고 있었다.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중고차 매매상이나 딜러들이 전기차를 아예 매입하지 않는다는 글들도 많았다. 한국에서는 장거리 운전을 하지 않아 충전에 불편함을 못 느꼈던 터라 일반 소비자 사이에 퍼져있던 ‘전기차 시기상조론’을 체감하지 못하고 살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단순히 캐즘을 넘어 ‘전기차 포비아’라고 불릴 정도의 사고들이 전 세계 곳곳에서 발생하고 있다. 지난 8월 17일 포르투갈 리스본 공항 인근의 한 렌터카 주차장에서는 테슬라 전기차에서 화재가 발생해 차량 200대 이상이 전소됐다. 이에 앞서 지난 8월 1일 한국 인천광역시의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는 4일간 주차중이던 벤츠 전기차가 갑자기 화염에 휩싸였고 주차장에 주차돼 있던 140여대의 자동차가 피해를 입었다. 화재는 8시간20분 만에야 겨우 진화됐다.


전기차 화재소식은 이곳 미국 땅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다. 국가교통안전위원회는(NTSB)는 8월 22일 캘리포니아 고속도로순찰대와 함께 테슬라 전기 트럭 ‘세미’에 대해 안전조사를 개시했다고 밝혔다. 3일 전 새크라멘토 인근 80번 고속도로에서 나무와 충돌한 세미 트럭에서 화재가 발생하고 932도가 넘게 달궈졌기 때문이다. 당시 소방관들은 진압에 엄두도 못내고 배터리가 전소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같은 달 라스베거스의 한 주택 가라지에서 테슬라 전기차량이 화염에 휩싸여 고양이 6마리가 죽었고, 10만달러 상당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전기차 캐즘은 미국 전기차 시장에서 독보적 1위 업체인 테슬라의 아성을 위협하고 있다. 업계 리서치업체 콕스 오토모티브에 따르면 테슬라의 올해 2분기 미국 전기차 시장 점유율은 49.7%로 추락했다. 테슬라의 분기별 점유율이 절반 아래로 내려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판매부진과 잇따른 화재 등 각종 악재로 테슬라의 주가는 8월 30일 기준 214.11달러로 연초 대비 11.2% 하락한 상태다.

전기차 화재가 발생할 때마다 완성차 업체는 “전기차 배터리 과충전은 화재의 결정적인 원인이 아니다”라며 “전기차 화재는 내연차보다 적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알고 싶은 것은 복잡한 화학공식이나 통계가 아니다. 왜 집에 멀쩡하게 주차장에 있던 차에 불이 나서 수백대의 이웃 차량을 태우는지, 단순 충돌사고임에도 폭발이 발생해 운전자가 탈출을 못한채 사망하는 사고가 나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전기차 화재가 내연차보다 적은 것도 아직은 전기차 보급률이 낮기 때문에 나타나는 착시현상이다.

유럽연합(EU)은 오는 2035년까지 내연기관 차량의 신규 출고를 금지하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고, 캘리포니아 주는 2035년까지 주 내에서 판매되는 신규 차량의 80%를 전기차량으로 의무화하는 내용의 정책을 추진 중이다.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 전기차가 피할 수 없는 대세라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완성차 업체가 화재의 책임을 운전자 부주의나 배터리 결함으로 몰고간다면 전기차 포비아는 오랜 기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제 완성차 업체가 응답해야 할 때다.

<박홍용 편집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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