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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소더스 가속화 할 정유업체 악마화

2024-10-30 (수) 박홍용 편집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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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지난 14일 개솔린 재고 부족과 가격 급등을 방지하기 위해 정유시설 보관 규칙을 강화하는 법안, 일명 ‘ABx2-1’에 서명했다.

뉴섬 주지사는 서명 직후 “개스값 폭등으로 인해 지난 수년간 캘리포니아 주민들이 수십억 달러의 피해를 봤다“며 ”우리는 더 이상 정유업계의 자정 노력을 기다릴 수 없으며, 폭리를 막고 소비자들이 주유 펌프에서 비용을 아낄 수 있도록 행동에 나선 것”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법안이 90일 안에 발효되면 주정부 규제 기관인 캘리포니아 에너지위원회는 각 정유시설의 저장 수준에 대한 제한을 설정할 권한을 갖게 된다. 위원회는 또 최소 재고량을 조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정유사가 유지 보수 중단에 앞서 재공급 계획을 마련하도록 요구할 수 있다.

뉴섬 주지사의 이번 서명은 그의 임기 내내 계속된 일명 ‘정유사 때리기’의 일환이다. 뉴섬 주지사는 지난해 9월 셰브론, BP 등 정유업체 5곳이 화석연료의 환경 및 보건 영향을 의도적으로 은폐해 수십억 달러의 피해를 끼쳤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앞서 지난해 3월에는 정유사가 폭리를 취한다며 ‘SBX 1-2’ 법안에 서명하기도 했다. 캘리포니아 에너지위원회(CEC) 산하에 ‘정유사 폭리 감시기구’를 설립해 정유업체의 수익 상한선을 설정하고 이를 초과한 업체에 대해 벌금을 매기는 내용의 이 법안은 지난해 6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캘리포니아가 기후변화를 최대한 늦추기 위한 혁신의 움직임에 최선봉에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캘리포니아는 1943년 스모그 사건을 직접 겪은 이후 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정유산업 규제정책을 펼치고 있다. 20세기 초까지만 하더라도 전 세계 석유의 5분의 1 이상을 생산했던 캘리포니아 주의 원유 생산량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내리 감소하고 있다. 캘리포니아 주는 오염물질이 덜 배출되는 청정 연소 휘발유 정제를 의무화하고 있고, 정유사들에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와 저탄소 연료 표준을 위한 설비 설치 등을 요구하고 있다. 당장 캘리포니아 주민들은 갤런당 59.6센트라는 소비세를 별도로 부과하고 있다. 청정 연소 휘발유 사용도 갤런당 10센트의 비용을 추가하는 요인이다. 이 같은 규제의 결과는 전국에서 가장 비싼 기름값으로 나타났다. 미국자동차협회(AAA)에 따르면 이달 29일 기준 캘리포니아의 갤런당 개스 가격은 4.587달러로, 전국 평균(3.134달러)과 1.45달러 가량 차이가 난다. 경쟁주인 텍사스(2.686달러)와는 거의 2달러 가량이나 차이가 난다.

뉴섬 주지사는 정유업체들을 악덕한 ‘스크루지 영감’으로 보고 있다. 다른 주보다 비싼 캘리포니아의 개스가격을 정유업체들이 폭리를 취한 결과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원인과 결과를 혼동한 결과다. 시장 가격은 단순히 수요과 공급에 따라 형성될 뿐이다. 캘리포니아 주정부의 규제가 강화되자 정유사들은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고 정유시설을 폐쇄하고 있다. 현재 주 정부의 가이드라인에 맞춰 정제가 가능한 정유소는 11개로 줄어든 상태다.

기업들은 떠나고 있다. 엑손모빌은 2015년 남부 캘리포니아에 위치한 연안 시추시설을 매각했다. 1879년부터 사업을 해오며 캘리포니아 정유사업의 상징과도 같은 기업인 셰브런은 지난 8월 캘리포니아를 떠나 텍사스 휴스턴으로 본사를 옮긴다고 선언했다. 이번에 뉴섬 주지사가 ‘ABx2-1’ 법안에 서명한지 이틀 만인 대형 정유회사인 필립스 66가 ‘장기적 불확실성’을 이유로 오는 2025년 4분기 LA 정유공장을 폐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상대 집단을 악마화하는 것은 매우 쉬운 전략이지만 엄청난 리스크를 안고 있다.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멀지 않아 대부분의 정유업체들은 캘리포니아를 떠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캘리포니아는 지금보다 더 비싼 가격에 다른 나라와 주에서 개스를 수입해야 할지도 모른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은 다른 주로 떠날 것이고, 서민들은 치솟은 기름값에 고통스러워할 것이다. 잠시 이탈 숫자가 둔화되기는 했지만 캘리포니아 엑소더스는 언제든 다시 속도를 낼 준비를 하고 있다.

<박홍용 편집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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