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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학생을 보호하지 못한다면

2024-11-06 (수) 황의경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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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의 한 유명 학교에서 일어난 폭행 사건을 알게 된 계기는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업무를 마치고 모 비영리단체 관계자 등과 만나 ‘아이 키우는 얘기’를 신나게 하던 중이었다. 단체 관계자가 갑자기 생각난 듯 들려주는 얘기는 내가 알던 그 명문 학교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진보적 가치관을 중시하는 학교답게 동성애 관련 교육을 활발하게 진행해 한인 학부모 몇몇이 학교 측의 교육 강요를 거부하고 전학을 갔다는 것이다. 나와 생각이 다른 교육집단으로부터 아이를 분리시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머릿속으로 하고 있을 즈음, 그뿐 아니라 얼마 전 백인 학생들로부터 한인 학생이 집단폭행을 당한 사건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다음날부터 피해자를 수소문했고, 어렵게 피해 학부모들과 연락이 닿았다. 그들에게 직접 사건 전말을 들으니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키우는 학부모로서, 그리고 한인으로서 정말 한숨만 나왔다. 기사를 통해 보도된 사건이 있은 후, 피해 학생 학부모들은 학교를 믿고 아이들을 계속 등교 시켰다. 그러나 재발 방지와 가해자 단속 등 문제 해결은커녕 곧바로 2차 가해가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피해 학생 A의 동생 또한 한 학년 아래 재학 중이었는데, 이 교실에서도 성희롱과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학부모들은 결국 자녀들의 등교를 포기했고, 아이들은 아직까지 학교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학교 측의 반응은 일관되게 미온적이었다. 이 사건은 집단폭행이 아니라 아이들 간 항상 있을 수 있는 해프닝이라는 것이다. 또한 가해 학생들의 신상과 폭행 당시의 CCTV 영상은 가해 학생들의 신변 보호를 이유로 공개할 수 없으며, 이와 관련한 추가 자료도 제공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학교 행사 중 가해 학생 중 한 명의 백인 학부모가 연단에 서 피해자들에게 사과하기 위해 연락을 취했으나, 그들이 연락을 거부했다고 연설했고,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고 칭찬하며 박수를 쳤다고 한다.


피해자와 일면식도 없는 한인 학부모도 연단에 올라 마치 한인 학부모들을 대표하는 양 피해자 측이 별일도 아닌 일을 크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고, 피해 학생을 걱정하거나 위로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으며, 몇몇 한인 학부모들의 반발은 묵살됐다고 한다.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던 피해자 학부모들은 나중에서야 이야기를 전해 듣고 분노를 금치 못했다. 피해자 학부모들은 가해 학부모들의 연락을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피해 학생 A의 아버지는 사건이 일어난 당일 밤 이메일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학교를 찾아갔다. 교장을 만나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교장은 한쪽 눈을 감고 바보 같은 표정을 지으며 “당신 아들이 영어도 못하고, 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라고 되물었다고 한다. 이 사건의 피해 학생은 한쪽 눈에 안검하수를 갖고 있다.

속해 있거나 속해 있다고 믿었던 사회 시스템으로부터 거부당하는 경험은 생각보다 쓰리고 아프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다는 현실을 마주할 때 느끼는 허무함은 우리의 발목을 붙잡고 아래로 끌어내린다. 폭행은 1차원적 사건이다. 누군가가 때리고 누군가 맞았다. 우리 주변에서 왕왕 일어나는 일이고, 뒤처리를 잘 한다면 전화위복으로 가해자와 피해자 양쪽 모두 세상을 살아가는데 값진 교훈을 얻을 수도 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선 사건을 처리하는 시스템이 공정하고 투명해야 한다. 피해자는 충분한 사회적 위로와 보상을 받아야 하고, 가해자는 자신이 저지른 일에 알맞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

현재 피해 학생들의 나날은 어두운 새벽과 같을 것이다. 매일 뜨는 해가 당연했던 시간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마음을 깊게 베인 아이들과, 이제 일곱 살 먹은 자신의 아이가 학교도 가지 못한 채 대인기피증 증세를 보이며 사람들을 피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할 피해 학부모들의 마음을 도무지 헤아릴 길이 없다. 내 아이가 당하지 않았다고 우리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또는 우리 아이들은 울타리 없는 세상 속에서 삶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 오늘 내가 외면한 불의가 언젠가는 우리의 울타리를 무너뜨릴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황의경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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