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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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나의 아시안 커뮤니티에게

2021-04-03 (토) 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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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주간 나는 상실감과 불안감과 함께 현실 감각과 방향을 잃어버린 채 살아오고 있다. 때때로 나보다 더 내 감정을 잘 알아차리곤 하는 나의 법적 동거인은 내가 뭐라고 형언할 수 없는 이 감정을 죽음을 추모하고 있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그렇다. 나는 아시안 혐오 범죄로 피해 또는 목숨을 잃은 수많은 타인들의 죽음을 추모하고 있는 중이다.

인종차별과 혐오로 인한 무고한 죽음들에 대한 분노 그리고 추모의 마음과, 한편으로 이 비극이 다른 비아시안들에게 잠시 스쳐 지나가는 뉴스나 다름 없다는 사실에 알 수 없는 배신감마저 느껴졌다. 내가 걱정되어 해주는 “조심해”란 말에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내 존재 자체가 나의 안위에 위협이 되는 지금, 도대체 내가 무엇을 어떻게 조심하란 말인가? 그리고 왜 그들이 아닌, 내가 조심해야 하는가? 그들의 세계와 내가 존재하는 이 세계의 다름과 간극이 매섭도록 명확히 느껴졌다.

비영리 단체인 Stop AAPI Hate (아시아계 미국인 및 태평양섬 주민 혐오를 멈추세요)는 작년 코로나 바이러스가 시작된 이후로 아시안 혐오범죄 신고를 수집해 왔다. 이 단체의 통계에 따르면, 작년 2020년 3월부터 올해 3월16일까지 3,795 건의 범죄가 신고되었다. 이처럼 많은 아시안 혐오 범죄가 일어나고 있음에도 미디어에서 이에 대한 뉴스는 드문 드문 다루어질 뿐이었다. 그리고 AAPI가 설립된 지 정확히 1년이 된 지난 3월16일, 애틀란타에서는 한국인 4명을 비롯 총 아시안 6명이 백인 남성의 고정관념적이고 뒤틀린 성적욕망으로 비롯된 혐오범죄로 희생당했다. 미디어에서는 스파에서 일하던 이 여성들을 가해자의 일그러진 시각으로 단숨에 성노동자라고 소개했고, 경찰은 기존의 혐오범죄 충족 요건을 기준으로 한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혐오범죄라고 단정짓기는 어렵다고 발표해왔다. 그제서야 뉴스에서는 연일 아시아인들에 대한 혐오범죄를 꾸준히 보도하고 있다.


미국의 아시안에 대한 혐오가 코로나바이러스를 통해 증폭되었다고는 하지만 백인 외에는 절대적으로 타자화되어온 그룹들에 대한 차별과 혐오의 역사는 엄연히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수많은 흑인들의 희생과 저항 그리고 투쟁의 결과로 1868년 수정헌법 14조가 생긴 이후, 법적으로 시민권을 모든 이에게 허하고는 있지만 유색인종은 실제적으로 사회를 살아가는데 있어 많은 권리 행사에서 배제되어왔다. 중국 이민자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대륙횡단 철도를 지었음에도, 그 수가 늘어나는 것을 국가적 정체성에 대한 위협이라고 느껴 그들의 이민을 막는 중국인 배제 조항이 1882년 실행되었고, 2차 세계대전 중에 시행되었던 일본계 미국인들의 강제수용은 미국이 싸워 맞섰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이나 아우슈비츠 수용소와 평행한 논리로 시행된 것이나 다름없다. 투표권을 제한하기 위한 법률이 만들어지고 있는 현재 조지아의 상황이나, 최근 영화 ‘미나리’가 골든글로브상에서 외국인 영화상 후보로 오른 것 또한 이 나라가 아시안과 우리의 언어를 어떻게 바라보고 타자화하는지 잘 보여준다.

혐오는 우리의 생명과 인권을 인간으로서 존중받고 지켜져야 할 것이 아닌, 돈 또는 다른 물건과 같이 환산할 수 있는 자본 또는 가치로 생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혐오는 같은 사람을 인간 대 비인간, 또는 인간 대 덜 가치있는 인간으로 나누어 생각하게 만든다. 경제적으로 대부분의 가치를 결정하고 시간을 분배하는 현재의 사회에서 이렇듯 보이지 않지만 만연해있는 혐오를 벗어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이 사회에 자본이 아닌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존재와 가치가 ‘모델 마이너리티’에 얼마나 가까운가에 의존할 필요도 없다. 이미 사회에 건설적으로 기여하는 이민자란 것은 충분히 증명해왔다. 설득과 호소없이 사람이기에 당연히 존중 받아야할 것이란 자세로 이 자리를 지켜야한다.

<이은정 휴스턴대학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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