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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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역사박물관에 기증된 삶의 기록들

2021-03-09 (화) 채영은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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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길었던 해외생활을 정리하고 영구 귀국하신 시부모님께서는, 그동안 수많은 이사를 거치는 동안에도 고이 간직해 오신 오랜 소장품들을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하 역사박물관)측에 기증하실 기회가 있었다.

총 852점의 자료 중에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것은, 군인이자 태권도 교관이셨던 아버님이 연이은 베트남 파병으로 어머님과 12년 긴 연애기간을 거쳐 늦은 결혼을 하시기까지 주고받은 무수한 손편지들이다. 지금이야 카톡이나 영상통화 등으로 어디에 있더라도 얼마든지 서로의 안부를 실시간 전달할 수 있지만, 당시 유일한 수단인 편지를 통해 두 분은 서로 못다한 이야기들과 애틋한 그리움을 빼곡히 담아내셨다. 생과 사가 오가는 전쟁터에서 바쁜 하루 임무를 마치고 밤늦도록 묵묵히 적어내린 아버님의 마음과, 고향서 긴긴 기다림 중에도 따뜻한 격려와 사랑을 전했던 어머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다. 내용적으로도 당시의 생활상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고 한다.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성화봉도 기증 목록에 자리한다. 대만에 사시면서 고국에서 개최되는 올림픽 성화 봉송 주자로 자원하셔서 고향 역 앞에서 군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씩씩하게 완주하셨다. 이 성화봉은 현재 국내서 가장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1988년 당시 성화봉이라고 한다. 이외에도 군인, 사업가로 활동하던 당시의 상장, 훈장, 파병 시절의 사진, 일기장, 올림픽 자료 등을 기증하시며, “내게 의미있는 자료들이 역사박물관에 보관된다는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일입니다”라고 공식 전시 첫날에 기증자 대표로 인터뷰하셨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역사박물관의 협조로 촬영한 구술 영상이다. 총 5개 주제로 진행된 구술 영상에서, 당시 건강이 좋지 않으셨음에도 또박또박 힘있고 조리있게 근현대 시기를 회상하셨다. 베트남과 대만에 태권도를 전파한 것, 대만에 한국어 웅변대회를 개최하여 현지인들의 한국 관광과 한국 기업 취업을 장려한 것, 그 영향으로 대만 대학에 한국어과가 개설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하셨다.

47년간 해외생활에서 한국인임을 늘 자랑스러워 하셨고 국위선양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셨던 우리 아버님. 존경하는 아버님은 이제 세상에 안 계시지만, 작금의 상황이 속히 나아져서 어머님을 모시고 광화문에 위치한 역사박물관을 다시 찾을 수 있길 소망한다.

<채영은 (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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