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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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트럼프 당’

2021-01-28 (목)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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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가 끝난 후 몇 달은 패배한 정당에게 뼈아픈 자성의 시기다. 다각적 패인 분석에 집중하는 이 시기는 책임공방으로 가차 없이 노출된 내분을 봉합하며 당의 새로운 미래를 위한 방향을 제시하는 중에 좌절을 딛고 긍정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서 백악관과 연방 상하원의 주도권을 모두 내주고 완패한 공화당에겐 재도약을 위해 필요한 자기성찰의 여유조차 허용되지 않고 있다.

선거 후 트럼프 대통령의 승복 거부와 수십건의 법정소송, 새해 초 친트럼프 폭도들의 의사당 난입과 이를 선동한 혐의에 의한 대통령 탄핵에 이르기까지 트럼프 발(發) 회오리가 계속 몰아치면서 자성은커녕 대선의 승패여부도 소신대로 인정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혼돈에 빠진 공화당을 남기고 퇴임했다. 재도약을 위한 메시지도, 새로운 리더십도 부재한 상황에서 사분오열의 내홍을 드러낸 공화당은 제각기 이해가 상충하는 조직과 조직, 계층과 계층 간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내전 상태로 치달았다.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친트럼프 대 ‘나머지’의 대립이다.

당 리더들과 전략가들은 트럼프 이후의 미래를 준비하기 원한다. 탄핵안에 찬성표를 던진 10명 공화당 하원의원 중 한명인 애덤 킨징어는 “공화당은 정체성을 찾는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우리는 영감을 주는가, 공포와 분열을 조장하는가, 공화당은 무엇을 대변하고 있는가를 자문하기 위해 필요한 싸움”이라면서 트럼프를 넘어 당의 전통적 가치 회복을 강조했다.

그러나 풀뿌리 조직을 중심으로 한 친트럼프 핵심진영의 생각은 다르다. 주·로컬 당 위원회를 통해 트럼프에 대한 충성을 거듭 다짐하고 트럼프와 거리두기를 원하는 워싱턴 의원들을 향해 유권자 무시를 멈추라며 “당의 성장을 위해 트럼프와 함께 일하든지, 아니면 트럼프와 전쟁을 치르며 당이 눈앞에서 자폭하는 걸 지켜보든지, 당신들에 달렸다”고 경고한다.

‘나머지’ 중 상당수는 트럼프가 퇴임 후에도 공화당에서, 특히 2022년 중간선거 당 경선에서 휘두를 수 있는 파워를 두려워한다.

공화당 표밭에서의 트럼프 영향력이 막강하기 때문이다. 대선에서 지긴 했어도 사상 2위 최다득표로 기록된 7,400만 표를 받았다. 공화당 유권자의 80% 이상이 트럼프를 아직도 지지한다. 74%가 ‘선거 사기’라는 그의 허위주장을 계속 믿고 있을 정도다.

내전의 판세가 한쪽으로 기울고 있다. 탄핵 찬성 의원들과 자신의 선거 뒤집기 시도를 돕지 않은 공화당 정치인들에 대한 보복 위협을 서슴지 않는 트럼프 진영을 등에 업은 저돌적인 친트럼프파에 비해 트럼프 대항 세력은 “너무 약하고, 소심하고 분산되어 별 힘을 못 쓰고 있다”고 악시오스도 진단한다.


지난 주말부터 이번 주 초 공화당 내 움직임이 이런 기류를 반영한다. 상원의 탄핵 재판 준비 과정과 일부 주 공화당의 공격적 행보를 통해 공화의원들은 트럼프의 당 장악력이 아직도 얼마나 강력한지, 그를 거스르는 위험이 얼마나 큰지를 체감하고 있다.

의사당 난입사태 당시 경악하고 분노한 의원들의 초당적 트럼프 비난으로 일견 가능해도 보였던 상원의 탄핵 유죄평결 가능성은 거의 사라졌다. 2월9일로 예정된 탄핵 재판에 앞서 26일 실시한 절차 투표에서 50명 공화 상원의원 중 45명이 트럼프 지지를 표했다.

랜드 폴 의원의 ‘퇴임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위헌’이라는 이의 제기는 55대45로 부결되었으나 트럼프 탄핵을 무산시키는데 필요한 34명을 훌쩍 넘어 45명이 탄핵 재판에 반대하는 폴의 편에 선 것이다. 폴의 위헌 주장은 공화의원들이 트럼프의 선동 언행을 옹호하지 않고도 탄핵 반대표를 던질 수 있는 정치적 피난처를 제공한 셈이기도 하다.

지난 주말부터 다투어 탄핵 찬성 의원들을 비롯한 트럼프 반대 혹은 지지 주저 인사들을 불신임 결의안과 위협적인 용어로 맹공격하고 트럼프 충성 서약을 발표한 애리조나, 오리건, 텍사스, 펜실베이니아, 켄터키를 비롯한 전국 곳곳 주 공화당의 행보도 트럼프의 건재를 말해준다.

특히 애리조나 주 공화당위원회는 애리조나의 대표적인 공화당 인사 3명에 대한 불신임 결의안을 채택했다. 작고한 존 매케인 상원의원의 미망인 신디 매케인과 전 상원의원 제프 플레이크가 조 바이든을 지지한 것에 분노하고, 덕 듀시 현 주지사가 트럼프 정책에 어긋나는 팬데믹 락다운을 시행했다고 비난한 애리조나 공화당의 결의안을 월스트릿 저널은 “향후 몇 년 전국에서 공화당을 소수당으로 파멸시킬 수 있는 분열의 상징”이라고 우려했다.

상원 탄핵 재판은 트럼프와 결별하고 그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지막 탈출구로, 공화당의 전통적 가치를 되찾을 드문 기회로 꼽혀 왔다. 그러나 지난 4년 계속 그랬듯이 공화당은 이번 역시 그 기회를 잡을 용기도, 의지도 없는 듯 보인다.

트럼프 진영이 위협하는 보복이 두려워서든, 표밭에서의 높은 트럼프 인기에 압도당해서든, 정치적 계산이 복잡해서든, 자의든 타의든…새해 초 시작되었던 공화 의원들의 트럼프와 거리두기는 한 달이 채 못가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상원의 트럼프 탄핵 재판이 10여일 남은 현재, 공화당은 여전히 ‘트럼프 당’이다.

<박록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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