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4, 5년 전쯤 추억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를 다시 본 적이 있었다. 60, 70년대의 미남 배우 알랭 들롱이 출연한 영화로, 약 40년 만에 다시 본 영화였다. 모든 추억이 그렇듯, 이 영화도 과거에 봤을 때보다는 영상이 무척 퇴색되어 있었다. 특히 태양에 반사되어 광채 나던 에메랄드 빛 바다가 예전의 그 쪽빛 바다가 아니었다. 혹시 영화관에서 상영되던 오리지널 영상이 아니어서 그랬을까? 한 지인에게 물어보니 추억이 너무 과장되어 있어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알랭 들롱의 얼굴도 남자답지 않았고 아무튼 실망만 안긴 재회였다. 추억이란 역시 추억으로 남겨두어야만 했던 것일까?
우리가 자라던 시대의 로망은 빵집과 영화관이었다. 주머니를 털털 털어봐야 동전 몇 푼, 버스 토큰이 전부인 우리에게 어쩌다 빵집이라도 들르는 날은 요즘 말로 말하면 대박 난 날이었다. 가난과 빵의 상대성 원리라고나 할까. 영화관은 또 왜 그렇게 가고 싶었는지… 미성년자 입장 불가일 수록 더 보고 싶었던 영화들... 물론 점심까지 굶어가며 모은 용돈으로 보았던 영화가 고작 ‘돌아온 외팔이’류의 중국 영화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빡빡머리 우리들 사이에서 영화 한 편 본다는 것은 어지간한 무용담에 속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명보, 국도, 대한, 스카라, 단성사, 국제… 우리는 마치 경쟁하듯 서울 시내의 영화관들을 하나씩 섭렵하며 돌아다녔다. 그중 없어진 파라마운트 극장 등을 기억하는 사람은 영화 꽤나 좋아했던 축에 들 것이다. 추억의 영화관 하면 변두리 동시상영 영화관들도 빼놓을 수 없다. ‘벤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사운드 오브 뮤직’ , ‘아라비아의 로렌스’ 등은 모두 3류 영화관에서 본 영화들이다. 물론 이런 영화들을 모두 돈 내고 봤다면야 골목대장의 한 사람으로서 여간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었을 터이다. 초등학교때까지 영화관은 문화센터(?)라기보다는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비상구를 통해서 대충 잠입해 들어가거나 3학년때까지 꼬마들은 어른들 손 잡고 끼어 들어가면 된다. 이웃의 아는 형은 비상구에 사람이 지키고 있어도 귀신같이 잠입해 들어가던 투명인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극장과 건물 사이의 3m 넓이의 협곡이 있었는데 이곳을 비호처럼 날아서 담 넘어 들어가던 배트맨이기도 했다. 만약 실수라도 해서 추락하는 날에는 7, 8미터 아래로 처박혀 어디 한 군데 부러질지도 몰랐던 아찔한 순간이기도 했다.
70년대는 70년대만의, 요즘 시대에는 없는 낭만이 있었다. 어렵고 힘들었지만 우리들의 머리 위에는 늘 태양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주머니 사정은 항상 넉넉치 못했지만 60원짜리 짜장면을 먹으면서도 행복했던 그때였다. 냉장고는 없었지만 얼음 수박화채를 먹으며 한여름 밤의 꿈에 젖곤 했다. 그 시절 한국 사회에서 알랭 들롱이란 배우가 인기 있었던 것은 프랑스 영화의 인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알랭 들롱 특유의 반항적인 눈빛과 야성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한국 사회는 너도나도 못살던 시대였기 때문에 모두가 벼락출세에 대한 환상들이 있었다. 다방에 넘쳐났던 것이 실업자… ‘사장님’으로 불리던 놈팡이들뿐이었다. 얌전히 직장생활만 해서는 여간해서 벗어나기 힘든 가난이었다. ‘그냥 공무원이나 되슈’라는 말은 그 당시엔 욕이나 다름없었다. 지금이야 공무원 되기가 하늘에 별 따기라지만 그때는 그랬다. 출세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불나비 청춘, 무모한 줄 알면서도 야망에 목숨 건 한 사나이의 완전범죄와 그 끝…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는 ‘자신이 만든 허구의 세계를 사실로 믿는다’는 리플리 증후군의 신드롬까지 낳을 만큼 당시 사회적으로 선세이션을 일으킨 영화였다. 친구 필립을 죽이고 스스로 필립이라고 착각하며 허구 속으로 무너져가는, 야망과 몰락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던져 주었지만 ‘태양은 가득히’, ‘암흑가의 두 사람’, ‘볼사리노’… 냉혹하고 드라이한 알랭 들롱의 연기에 한국 사람들은 열광했다.
인터넷 뉴스를 훑다 보니 그 알랭 들롱이 출연했던 ‘태양은 가득히’(Plein Soleil)가 개봉 60주년을 맞이했다는 소식이다. 1960년에 개봉했으니 그때 태어난 아이들이 이제 모두 60이 되었다는 얘기다. 한 세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 이름하여 베이비붐 세대. 우리 세대는 말이 좋아 베이비붐 세대였지 한마디로 총알받이나 다름없었다. 조국 근대화의 주역, 산업화의 역군으로서 70, 80년대 공돌이 공순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것은 굴욕과 자기희생, 끝없는 포기였다. 이제 조국 근대화도 끝났고 경제력이 세계 10위 안에 드는 한국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국은 여전히 행복해 보이는 모습이 아니다. 요즘 세대를 가리켜 연애,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희망까지 포기한 ‘N포 세대’라나… 물질문화… 그것은 한국사회의 극복해야 할 (시대적) 과제이자 양날의 칼이기도 했다. 오늘날의 양극화는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던 건조한 삶의 태도때문은 아니었을까?
우리 세대는 조금 가난하기는 했어도 희망 같은 것은 살아 있었던 것 같다. 꼭 ‘태양은 가득히’ 가 아니래도 ‘태양을 향해 쏴라’, ‘태양을 향해 던져라’같은 태양을 제목으로 한 작품들이 유난히 많았었다. 오늘날처럼 어둡고 무감동의 극치를 달리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려운 사회적 여건 속에서도 무언가를 이루려는 찡한 노력이 있었다. 악조건 속에서도 가치를 증명해야 했던 개성 만점의 세대... 그 조역들이 이제 저무는 태양을 향해 마지막 스퍼트를 남겨놓고 있다. COVID 19를 뒤로 하고 올 한 해를 되돌아본다. 부수적인 것들만을 위해 허우적거렸던 무감동…상처만 남긴 한 해였다. 어제를 잊지 않고 희망을 향해 다시 뛰는 (모두의) 모습을 기대해 본다. 팬데믹이 갉아먹고 영혼은 늙어 가지만 내일을 향해 뛰자.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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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