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77년 미 2사단 복무시절에 DMZ 근방에서 찍은 사진. 한 손에는 M-16, 허리에는 방독면을 찬 모습이 인상적이다. 당시 8.18 도끼 만행사건 이후라서 훈련이 빡셌다.
앞으로 할 이야기들은 실화이며, 또한 사랑의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남녀 간의 그런 달캉달캉한 이야기는 기대 안하시기 바란다. 이 이야기들은 남자이기에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경험해 보았을, 그래서 이제야 남자라고 혼자서 묵묵히 걸을 수 있는, 그런 위치에 다다른 남자들에게 바치는 사랑의 오마주(Homag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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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계는 해가 떠있는 시간과 맑은 날에만 사용 가능하다. 명암이 존재하는 세계에서만 사용 가능한 해시계와 같이 하늘 아래에서 같은 삶을 살아가도 명과 암 이 분명 갈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 혹자는 그것을 팔자소관이라고도 한다. 또 많은 이들은 운명이란 자기 자신이 개척 해나가는 것이라 믿는다.
나 또한 운명은 자신이 만들어 가는 것이라 굳게 믿으며 살아왔다. 내 인생에서 내 삶의 향방을 결정하는 사건은 일찍 찾아 왔다. 돌아보니 하늘아래에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가장 중요했다. 설사 그 만남이 그 순간은 대수롭지 않았더라도….
#생소했던 학교생활
삼형제가 이민 와서 학교에 입학해보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히피 문화가 사회 전반에 만연되어 있었고 고등학생들의 무분별한 성문화 때문에 반에는 애 엄마도 있었다. 학생들이 화장실에서 마약을 사용하자 화장실 문짝들을 없애 버리기도 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흑인은 흑인끼리, 백인 학생들은 백인끼리 어울리는 것이었다. 몇 안 되는 동양 학생들은 겉도는 모양새였다. 그 피부색을 초월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돈이었다. 돈은 인종 차별도 초월하여 상류사회로 진입시켜주는 것을 보았다. 초창기 한인들은 볼티모어와 프린스 조지스 카운티에 살고 있었다. 같은 동양인이라도 돈을 벌어 성공한 사업가는 빈민가(ghetto)를 벗어나 당시 백인 중류 동네로 이주하고 있었다.
#고1이 겪은 인종차별
매일 등교하는 것이 고역이었다. 고1이었던 나는 거의 매일 흑인들의 시비와 조롱에 시달렸다. 주로 “칭 총” 하며 중국인 흉내를 내거나 학교 복도에서 양 눈가를 찢어 보이며 킬킬거리기 일쑤였다.
백인 아이들은 노골적인 인종차별보다 싸늘한 멸시, 그리고 넘을 수 없는 거리를 항상 유지 했다. 학교에 가도 알아들을 수도 없으니 재미가 없었다. 그렇다고 학교에서 이민 온 학생들에게 그 무엇을 해주는 것도 아니었다. 알아서 빨리 적응하는 것이 살아남는 방법이었다.
우리 학교는 흑백 학생 통합이 이루어진지 얼마 안 되는 상황이라서 분위기가 살벌했다. 정문 복도 벽에는 졸업생 사진들이 걸려 있었는데 년도 별로 흑인 학생은 늘어나고 백인 학생 수는 줄어드는 것이 명백했다.
어느 여름날 백인 친구와 같이 아파트 풀장에 갔다. 창고를 정리하는데 큰 사인 하나가 한 구석에 쳐 박혀 있었다. 뒤집어보니 “흑인, 유태인 그리고 개들은 풀 사용 금지”라고 쓰여 있었다. 어린 나이에도 얼굴이 확 달아올라왔다. 동양 사람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내 처지가 녹녹치 못함은 그 누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내 환경이 어렵다 하더라도 더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한국에 홀로 있는 어머니를 하루 빨리 모시고 오는 일이었다.
#윤씨 아저씨
아버지에게 어머니에 대한 언급을 하는 것은 별 소용이 없었다. 아들에게 상세하게 설명하시는 스타일도 아니었지만 일단 시민권자였던 분과 이혼 후 얼마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버님의 친구 분인 윤씨 아저씨에게서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 일생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은 부모도 친구도 아닌 엉뚱한 사람으로 인해서 벌어졌다. 그 분의 인상은 깨끗했다. 대화에서 감정이 배제된 논리적인 화법이 내게 인상적이었다. 이스라엘에 한국 농수산부 직원으로 파견되기도 했던 그는 당시 불체자 신분이었다. 그에게는 한국에 부인과 어린 아들이 있었다.
한 사람에게 미치는 큰 영향은 어느 훌륭한 연설보다 조용한 논리적 정보가 훨씬 유익하다. 그 분은 우리 비좁은 아파트에 오셔서 아버님과 무엇인가 의논하셨다. 아마도 신분 문제였을 것이다. 우리 세 자매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사는 처참한 모습이 딱해 보였는지 어느 날 형과 나에게 이런 말을 하셨다. “너희들 엄마 모시고 오고 싶으면 군대 가야해. 군대 가면 시민권도 금방 주고 G.I. Bill로 대학 학비도 대주고 집 융자도 해줘!”
#보호자 동의서가 필요했던 미군 입대
무엇보다 시민권을 빨리 준다는 말이 귀에 솔깃하게 들어왔다. 당시 영주권을 받고도 8년인가를 기다려야 시민권 신청이 가능했다. 시민권이 있어야 어머니도 빨리 미국으로 초청 가능 하다는 것을 그분이 차근차근하게 설명해주었다.
얼마 후 가까운 쇼핑몰에 있는 군 입대 사무소(Military Recruiting Station)에 갔다. 멋진 빨간 정복의 해병대 하사관이 나를 맞았다. 첫 질문은 “영주권 있느냐, 몇 살이냐?”이었다. 나이가 어려서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물었더니 부모의 동의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월남전 직후 미군은 지원 체제로 바뀌었고 지원자들이 부족해서 어린 학생들과 가난한 지역 젊은이들을 타깃 삼아 소집했다. 해병대는 나이 제한이 다른 군보다 어려서 보호자 동의 아래 16세이면 군에 입대 가능했다. 지원서와 보호자 동의서를 청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나는 아버지의 동의와 상관없이 미군에 필히 입대하겠다는 의지를 굳혔다.
#스파이 작전 같은 탈출 그리고 가족과의 이별
형과 같이 군에 입대하기로 합의했다. 형은 문제가 없었으나 나는 아버지로 부터 보호자 동의서를 받아내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얼마 후 다시 찾은 그 해병대 하사관은 내가 내민 지원서와 동의서를 여러 번 보며 내 얼굴 표정을 살폈다. 그는 지원병을 하나라도 더 소집해야 하는 상황, 나는 꼭 입대해야 하는 입장. 때로는 무언이 그 어느 웅변보다 낫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입대 필기시험 보는 날 형과 둘이서 시험장에 갔다. 당시 영어 실력은 형이 나보다 월등히 좋았다. 우리 둘은 같이 군에 입대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데 시험 결과가 너무 뜻밖이었다. 나는 붙고 형은 떨어진 것이다.
입소 날, 하사관이 새벽에 나를 픽업해 주겠다고 말했다.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새까만 새벽 아침에 그의 차가 아파트 주차장으로 진입한 후 헤드라이트를 깜빡였다. 나는 침실도 없는 원룸 아파트에서 현관문을 열면 아버지가 깰까봐 미리 살짝 열어둔 창문을 열고 밖으로 탈출했다.
그렇게 달려간 그의 사무실에서 뜻밖의 사실을 알아냈다. 한국에는 해병대 기지가 없어서 한국 근무가 개런티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내가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어머니와의 상봉이 물거품 되는 순간이었다. 눈물을 펑펑 흘리며 한국에 계신 어머니 때문에 해병대에 입대했는데 한국 근무가 불가능하면 군에 안 간다고 생떼를 썼다.
나의 쇼 같지 않은 쇼를 사무실 코너에서 조용히 보고 있던 육군 상사 아저씨가 나에게 다가와서는 내 학생증을 요구해서 보여주었더니 “He just passed his birthday, he can join the Army, let me have him(생일 지났으니, 육군에 입대 가능해)” 하면서 나를 그의 데스크로 가져갔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그가 안내하는 데스크로 갔다. 한순간 해병대에서 육군으로 갈아탄 것이다. 칠흑 같은 암흑에서 한줄기 희망의 불빛이 보이는 순간이었다.
<다음에 계속>
(jahn8118@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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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ff A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