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화요일자 교육섹션에 ‘건국의 아버지들’ 시리즈를 연재한다. 이 시리즈에서는 뉴저지와 워싱턴 지역을 오가며 활동 중인 이종권 씨가 한글로 번역한 역사서 ‘The Book of the Founding Fathers’에 수록된 미국의 정신과 미국 건국에 가장 의미 있게 공헌한 인물, 독립이라는 꿈을 품고 키웠던 용기 있는 지도자, 세계 최초의 연방 민주주의로 실현해낸 사람들 35인을 조명한다. 존 애덤스, 조지 워싱턴, 벤자민 프랭클린, 토마스 제퍼슨, 알렉산더 해밀턴, 제임스 매디슨, 조지 메이슨 등 미국에 사는 우리가 필수 교양으로 꼭 알아두면 좋을 인물들이 매주 1명씩 소개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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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해리슨의 약력
△1726년 출생 추정, 버지니아 찰스 시티 카운티 출생 △1745년 윌리엄 앤 매리 대학 수학 △1749-74년 버지니아 하원의원
△1773년- 버지니아 통신위원회 회원 △1774-76년 지역의회 의원 △1777-81년 버지니아 의회 대변인
△1781-84년 버지니아 최고행정관 △1785-91년 버지니아 의회 대변인 △1788년 버지니아 비준회의 대의원
△1791년 4월 24일 버지니아 찰스 시티 카운티에서 영면
부유한 버지니아의 농장주이자 정치지도자였던 벤자민 해리슨은 인지세법(1765) 때부터 혁명기간 내내 독립의 대의에 동참함으로써 제임스 강변에 펼쳐진 그의 광대한 농지를 잃을 위험에 빠뜨렸고, 영국군의 약탈로 막대한 재산을 잃기도 했다.
버지니아 입법부에서 해리슨은 인지세법에 반대하는 공식 항의서를 초안하는 데 기여하였고 통신위원회와 초대 지역의회의 일원으로서의 활동을 인정받아 대륙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3개의 주요 위원회 소속으로 외교, 육군 그리고 해군 관련 업무를 다루었다. 이들 실무위원회는 훗날 합중국 정부의 주요 부처로 발전하기 위한 토대가 되었다. 해리슨은 또한 전체위원회 의장으로서 1776년 7월 2일 회의에서 독립을 주장하는 리의 결의안 표결을 찬성으로 이끌었다. 독립선언서에서 해리슨의 서명은 동향인 버지니아 출신 토마스 제퍼슨의 바로 옆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륙회의에서 해리슨은 여러 토론을 주재하여 연합헌장 채택을 끌어냈다.
전쟁기간 동안 해리슨은 버지니아 의회 대변인을 역임했고 영국이 (버지니아) 요크타운에서 항복했던 당시의 현직 최고행정관이었다. 그가 최고행정관 재임 중 버지니아는 오하이오 강 북쪽과 서쪽 땅에 대한 권한을 연방정부에 양도했다. 이 조치는 제퍼슨이 주요한 역할을 했고, 새로운 합중국의 결속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해리슨은 합중국 헌법 비준을 토론하기 위해서 소집되었던 버지니아 의회의 대의원으로서 선거위원장을 맡았지만 많은 토론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그는 권리장전이 빠진 헌법을 거부하며 패트릭 헨리에게 동조했다. 권리장전이 없는 헌법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해리슨과 헨리, 조지 메이슨 등의 강경한 주장은 합중국 헌법에 제1차 수정헌법 10개 조항을 추가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건국의 아버지들 가운데 벤자민 해리슨은 두 명의 대통령을 직계 후손으로 둔 유일한 인물이다. 아들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9대, 그리고 손자인 벤자민 해리슨은 23대 합중국 대통령을 각각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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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권 / 번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