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2025-04-01 (화) 09:03:24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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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쉬테일, 톨테일

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내가 다니는 학교의 남자 교직원용 화장실의 인테리어는 낚시가 주제다. “일이란 낚시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것(Work is for people who don’t know how to fish!)”이라며 실 없는 소리를 새긴 액자 옆에 또 이런 문구가 있다. “Fish Tales Told here”. 생선꼬리(tail) 말고 물고기 이야기(tale)를 들어보자.

피쉬 테일은 동서고금을 관통하는 낚시꾼들의 뻥을 말한다. 잡았다가 놓친 고기는 예외 없이 죄다 월척이다. 이따만 했다고 양팔을 활짝 벌리는데 사진이 없다면 믿을 수가 없다. 사진이 있어도 그렇다. 팔을 쭉 뻗어 카메라 앞에 들이대면 피라미도 대물로 보인다.
어디 낚시꾼들만 그러겠나. 남정네들의 세상이 원래 그렇다. 이렇게 과장으로 부풀린 이야기를 통털어 영어로는 톨 테일(tall tale)이라고 한다. 키가 큰 얘기?

이 단어를 처음 대하고 그 뜻을 알게 됐을 때 내 머리에 떠오른 노래가 있었으니 가수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킴’(1966년)이었다. 김상희의 “여덟시 통근길에 대머리총각~”과 더불어 국민학교에 갓 들어갔을 당시 열심히 따라불렀었다. 그러니까 남자어른이란 키다리 아니면 대머리 둘 중에 하나인 것인데 왜 하필 나는 후자의 길로 간 것인가.


푸념을 멈추고 키다리 미스터킴으로 돌아가면, “세상에 키 크고 싱겁지 않은 이 없다고~” 말할 정도로 키 큰 인간들 말은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 된다. (그래, 나 키도 작다) 대충 에누리 해서 들어야 한다. 영어의 톨 테일스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아메리카 땅의 톨 테일스는 올드 웨스트, 서부개척 시기의 척박한 변경에서 태어났다. 거친 사내들끼리 남성성을 경쟁하는 자리에서는 허장성세가 넘치기 마련이다. 그건 한국의 예비군 훈련장에서도 내 익히 경험한 바 있다.

혼자서 열일곱을 상대하는 식의 무용담이 미국 민담의 뿌리가 된 배경이다. 우선은 실존 인물들의 행적이 과장되어 전해졌다. 수호천사의 안내를 따라 서부로 서부로 사과나무를 퍼뜨렸다는 조니 애플시드(Johnny Appleseed), 애팔레치안 산맥 서쪽 너머로 길을 내서(이른바 락키 갭 루트) 켄터키를 개척한 대니얼 분(Daniel Boone), 텍사스 알라모 전투에서 칼잡이로 용맹을 떨쳐 부위 나이프로 이름을 남긴 짐 부위(Jim Bowie), 테네시 출신으로 역시 알라모 전투에서 이름을 남긴 데이비 크로켓(Davy Crockett) 등등이 있어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이들이 등장하는 아동도서를 쉽게 접하게 된다.

그중 데이비 크로켓은 디즈니에서 만든 드라마로 흑백티비 시절에 본 기억이 난다. 줄무늬 꼬리 달린 너구리 털모자(coonskin cap)에 머스킷 장총을 들고 다녔지 아마.

역사상의 인물이 신화가 되는 것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우리 역사에도 민담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실존인물들이 있다. 병자호란 당시의 명장 임경업 장군이 그러한데 방방곡곡에 그의 전설이 내려져 온다. 속리산에서 무술을 수련했다는 경업대, 누워있는 바위를 번쩍 들어 세웠다는 입석대, 칼로 쳐서 길을 냈다는 바위틈을 지나 동굴 속에 고인 장군수로 목을 적시면서 우리를 도탄에서 구원할 아기장군을 기다리는 백성들의 염원을 어렴풋이나마 느낀 바가 있었다.

한편 톨 테일의 주인공에는 가공의 완전 구라도 있다. 덩치가 어마어마한 벌목꾼 폴 버니언(Paul Bunyan)이 대표다. 일분 안에 팬케익 오십 개를 꿀꺽한다든지, 그가 도끼질로 찍어낸 땅이 그랜드 캐년이라든지, 쿵 하고 찍고 간 발자국이 만 개를 헤아리는 미네소타의 호수들이 되었다든지 그런 황당무계한 얘기를 쏟아낸다. 완전 개뻥인데, 미국인들로부터 엄청 사랑을 받는다.

하여튼 이런 허풍쟁이 구라들이 통하는 나라인 걸 보면 나도 학교에서 뻥 좀 쳐도 될 것 같다. 블랙 핑크의 제니, 로제 걔들 다 내 아는 집 애들이라고. 나한테 오빠 오빠 그런다고.

<정재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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