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욱의 워싱턴 촌뜨기
2025-04-15 (화) 08:02:09
정재욱
내시경 검사를 마치고 오래간만에 평일 하루를 집에서 보냈다. 의사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고 했는데 창문 밖으로 삐죽삐죽 제멋대로 자란 잔디가 보기에 영 불편하다. 봄도 이제 한복판이니 잔디깎기 시즌에 들어가야 하나. 주말까지 며칠 더 버텨도 될까. 이러다가 봄비 한 차례 내리면 감당이 안 될텐데. 게으른 선비 책장만 넘기듯이 앉아서 고민 하다가 무거운 엉덩이를 들었다. 가벼운 전동 트리머를 들고나가서 군데군데 삐쳐나온 풀만 대충 다듬었다.
남들 보기에 흉하지는 않겠군. 다시 찾아온 평화. 식탁 의자에 앉아 새모이통을 찾는 새들을 창 너머로 지켜보며 느긋하게 오후를 누리고 있는데 붕붕 론 모우어, 예초기 소음이 들린다. 옆집에서 시즌 초반부터 치고 나왔다. 한국 프로야구의 봄떼인가 꼴데인가. 지난 해에 이사 온 옆집은 아들만 셋이다. 그중 첫째 브래드가 론 모우어를 밀고 있다. 8학년, 학군에 따라 중2 혹은 중3이다. 고놈 참. 달랑 딸 하나인 내가 아들 둔 집이 부러울 때가 이럴 때다. 낙엽 떨어질 때, 눈 내릴 때.
잠시 졸았나 보다. 현관을 두드리는 소리에 깼다. 누가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아내가 문을 여니 브래드다. 반은 다르지만 같은 학교의 선생과 제자이니 그들의 비즈니스, 나는 빠졌다. 둘이 뭔가 얘기를 나누고 아내가 입을 벙실거리며 전해주는 바, 잔디 깎기 딜이 들어왔단다. 20불에. 소년 사업가의 진지하고 긴장된 얼굴에 아내는 거절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힘들어도 잔디는 아직까진 내 담당이었다. 그거라도 해야 집안일 한다는 생색을 낼 수 있으니까. 그래도 자기 용돈 스스로 벌겠다는데 동네 어른이 돕지 않을 수가 없다. 20불은 좀 그렇지? 둘이 입을 맞췄다.
인생 첫 거래를 성사시킨 브래드는 신이 나서 우리집 국경을 넘었다. 예초기로 종횡무진 우리 국토를 누비기 시작했다. 그 집 엄마도 나와서 응원했다. 마수거리해준 아내에게 연신 고맙다고 했다. 떡고물이라도 떨어지는 게 있는 것인지 바로 밑의 동생 토미도 형 뒤를 따라다니며 잔가지들을 주웠다. 오호, 제법 갖춘 기업일세. 귀사의 일익번창을 기원합니다. 사업가 브래드의 앞날이 예초기가 밀고 간 잔디밭처럼 탄탄대로로 뚫려가는데, 인생이 어디 그리 만만하더냐. 마당 한복판 노르웨이 은단풍의 뿌리가 불거진 자리를 넘다가 예초기가 그만 서버렸다. 인생 복병. 이렇게 해도 저렇게 해도 시동이 다시 걸리지 않는다. 우리의 브래드, 여기서 굴하지 않고 집에서 트리머를 가져와 어떻게든 마쳐보려는데 그게 쉽겠나. 그 모습을 재미있게 지켜보던 아내와 내가 나갔다. 예초기는 아빠랑 고쳐보고 우리 집 예초기를 쓰라고 했다.
뒷마당에 데리고 가서 우리 예초기에 기름을 채우고 시동이 걸리는지 확인했다. 오케이. 그렇게 앞마당을 마쳤다. 문제는 당초 계획했던 시간에 훨씬 지체됐다는 냉정한 현실. 숙제 할 시간이 됐나 보다. 다소 기가 죽은 브래드 사장이 아내에게 양해를 구해 왔다. 나머지 잔업은 토요일에 다시 와서 마쳐도 되겠느냐고. Sure! 사업의 기본은 신뢰, 양해각서까지 쓰지는 않았다.
돌아서는 브래드를 아내가 다시 불러 30불을 손에 쥐어줬다. 언제든 너 시간 날 때 마칠 걸로 알고 지금 준다고. 브래드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20불인데… 나중에 큰 사업가가 되어 우리를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나는 사업을 K-비즈니스로 배웠다고.
<
정재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