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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의 정치학

2020-09-22 (화)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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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 헌법은 정부를 입법, 행정, 사법 3부로 나누어 서로 상대를 견제하도록 하고 있다. 이중 입법부는 법을 제정할 권한과 ‘지갑의 힘’으로 불리는 예산 배정권을 갖고 있다. 행정부는 방대한 공무원 조직과 함께 군대와 경찰을 갖고 있다. 이에 비하면 사법부는 초라하다. 사법부의 최고 조직인 연방 대법원의 판사수는 고작 9명이고 독자적 예산도, 군대와 경찰도 없다.

그러나 힘없어 보이는 사법부지만 주요 이슈의 최종 결정권은 여기 있다. 그 이유는 제4대 이자 역사상 가장 오래 대법원장으로 재직한 존 마샬(재직 기간 1801~1835)이 마베리 대 매디슨 사건을 통해 대법원의 ‘사법 심사권’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사법 심사권’이란 의회가 제정한 법률이 연방 헌법에 합치하는가를 판단하는 권한으로 대법원이 위헌으로 판단하면 그 법은 효력을 잃는다.

거기다 연방 헌법은 대법원의 독립성을 보장하기 위해 대법관의 임기를 “성실히 근무하는 동안”(during Good Behaviour)으로 정하고 있다. 이는 특별한 과오가 없는 한 죽거나 자진해 물러날 때까지 할 수 있다는 말로 탄핵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종신직임을 밝힌 것이다. 미 역사상 대법관 중 탄핵당한 사람은 1805년 새뮤얼 체이스 단 한 명뿐이고 그나마 하원에서는 탄핵됐으나 상원에서 무죄 평결을 받는 바람에 대법관 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연방 대법관은 직업 안정성이 가장 뛰어난 자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렇다 보니 대법관에 어떤 생각을 가진 사람을 앉히느냐는 공화 민주 양당 모두 양보할 수 없는 초미의 관심사다. 거기다 요즘 평균 수명이 길어지다 보니 한 번 그 자리에 앉으면 수십년 동안은 법관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하게 된다. 이를 둘러싼 싸움이 날로 치열해지는 이유다.

20세기 들어 가장 뜨거웠던 대법관 인준 투쟁은 1987년 일어났다. 레이건 대통령이 로버트 보크를 대법관으로 지명하자 민주당에서는 벌떼 같이 들고 일어나 결사 반대를 외쳤다. 그가 민권 운동과 낙태권을 반대하는 극단주의자라는 게 표면적 이유였지만 닉슨 탄핵 위기 때 자신의 상사들과 달리 사임하지 않고 닉슨의 명대로 특별 검사를 해임시켰다는 게 결정적으로 밉보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결국 연방 상원의 인준을 받지 못해 낙마했고 이를 계기로 “상대방을 융단 폭격해 낙마시킨다”는 뜻으로 ‘bork’라는 영어 단어가 새로 생겨났다.

2년 뒤 아버지 부시가 클레런스 토머스를 대법관으로 지명하자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그와 함께 일했던 애니타 힐이 토머스가 자신을 지속적으로 성희롱했다고 주장하자 민주당은 그를 ‘제2의 보크’로 만들기 위해 총공세를 폈다. 그런나 토머스가 이를 “오만한 흑인에 대한 하이텍 린칭”으로 규정하자 민주당은 한 발 물러섰으며 그는 결국 인준을 받았다.

그리고 거의 30년이 지난 2018년 트럼프가 브렛 캐버너를 대법관에 지명하자 똑같은 일이 되풀이됐다. 크리스틴 포드라는 여성이 80년대 초 캐버너가 자신을 성폭행했다고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캐버너는 끝까지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고 그는 결국 50대 48로 가까스로 인준됐다.

양당의 이념 대립이 극심해지다 보니 자기 당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인물이 지명되면 아예 청문회를 열지도 않는다. 2016년 오바마가 안토닌 스칼리아 사망으로 공석이 된 대법관 자리에 메릭 갈런드를 지명하자 연방 상원을 장악하고 있던 공화당은 대통령 선거가 10개월 남았는데도 대법관 지명은 새로 선출된 대통령이 해야 한다며 청문회조차 열지 않았다.

지난 주말 자타가 공인하는 ‘진보의 아이콘’ 루드 긴즈버그 대법관이 87세를 일기로 사망하면서 그 후임자 지명을 둘러싼 양당간의 공방이 격화되고 있다. 민주당은 갈런드의 전례를 들어 후계자 지명은 이번 대선 승자가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공화당은 즉시 지명과 인준을 외치고 있다. 이런 주장은 4년 전 자신의 입장을 뒤집는 것이지만 이에 얽매일 것 같지는 않다. 그러기에는 대법원에 자기 편을 넣어야 한다는 유혹과 압력이 너무나 거세기 때문이다.

이념 대립이 격해질수록 모든 이슈의 최종 결정자인 대법관의 중요성은 커질 것이며 여기 자기 사람을 앉히려는 양당의 싸움은 더욱 거칠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해 보인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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