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극으로 끝난 ‘최장수 서울시장’ 박원순 생애
▶ 사법개혁등 시민운동 앞장, 보궐선거로 입성 최초 3선…대선 꿈은 못 이루고 떠나
지난 2011년 10월 27일, 당시 만 55세의 시민운동가이던 경남 창녕 출신 박원순의 이름 뒤에 ‘서울특별시장’이라는 직함이 붙었다. 당시 누구도 그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오래 재임한 서울시장이 되리라 예측하지 못했을 테고, 그의 최장수 서울시장 임기가 극단적 비극으로 끝나리라고 내다본 이는 더더욱 없었을 것이다.
박시장은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상급식에 반대하며 시장직을 걸고 주민투표를 벌였다가 물러난 뒤 보궐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나경원 당시 한나라당후보를 제치고 당선됐다.
공직선거에 처음 도전한 정치 초년생이 곧바로 서울시장 자리를 꿰찬 것이지만, 그는 정계에 입문하기 오래 전부터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는 1994년 참여연대 설립을 주도하고 1995~ 2002년 이 단체에서 사무처장으로 일하면서 한국 시민운동을 진화시켰다.
1995년 사법개혁운동, 1998년 소액주주운동, 2000년 낙천·낙선운동 등 굵직한 시민운동마다 그의 이름이 남아 있다.
그 전에 박시장은 이름을 날리는 인권변호사였다. 학생운동으로 구속돼 서울대에서 제명된 뒤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이어 1982년 사법연수원 12기 수료와 함께 검사로 임용됐다가 1년만에 박차고 나와 ‘인권변호사의 전설’인 고 조영래(1947∼1990) 변호사와 함께 일하면서 부천서 성고문 사건, 미국 문화원 사건, 말지 보도지침 사건 등의 변론을 담당했다. 1990년대 중반에는 ‘서울대 성희롱 사건’의 변호인 중 하나로 활동했다.
박시장은 이어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새누리당 정몽준 후보를 63만여표 차로 이기고 재선에 성공, 자연스럽게 유력한 차기 주자로 부상했다. 그러나 서울시정으로 여의도 중앙 정치 무대와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 당내 지지기반이 약하다는 점이 늘 아킬레스건으로 지적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에 따라 2017년 더불어민주당 19대 대선후보에 도전했지만, 지지율 저조로 당내 경선에 참여하지 않고 불출마를 선언했다.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선 ‘민주당 야전사령관’을 자임, 서울시 민주당 후보들을 지원하는 데 공을 들였다. 자신의 선거에서도 어렵지 않게 3선에 성공했다.
올 4·15 총선에서는 기동민, 박홍근 의원을 필두로 ‘박원순계’로 불리는 의원 10여명이 대거 원내에 진입하는 성과도 냈다. 특히 코로나바이러스 국면에서 긴급재난지원금 이슈를 선도하며 독자적으로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최근에는 부동산 정책과 관련, 강남 그린벨트 완화 문제를 둘러싸고 민주당 지도부와 각을 세웠다.
그는 지난 6일 민선7기 2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조용한 혁명을 일으켜 왔다고 감히 평가하고 싶다”며 “(대통령직은) 하고 싶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때로는 안 되고 싶어도 하게 되는 운명적 직책”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통령을 꿈꿔온 그의 정치 여정은 상상도 못한 사건으로 한번에 허물어지며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