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보다 살기가 나아졌습니까?” 현직 대통령 카터를 누르고 도전자 레이건에게 압승을 안겨준 이 유명한 질문을 지금 던진다면 아마도 “아니요!”라는 함성이 메아리칠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가중되는 표밭의 불안을 누구보다 절감하는 사람은 트럼프 대통령일 것이다.
재선 승리가 최우선 과제인 트럼프에게 현재의 선거 환경은 좌절 그 자체다. 지지율은 경합주에서도 조 바이든에게 나날이 뒤지고 있고, 재선 티켓으로 자신했던 경제를 망쳐버린 코로나바이러스는 13만여명의 사망자를 내고도 확산을 멈출 기세가 아니다. 재선 전망이 너무 비관적이어서 “백악관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고 악시오스는 전한다.
이 총체적 난국을 벗어나기 위한 트럼프 캠페인의 ‘생존전략’이 지난 주말 두 차례의 독립기념 연설을 통해 확실하게 드러났다. 제도적 인종차별 폐지를 촉구하며 노예제 연관 인물들의 동상 철거운동에 돌입한 시위대에 맞서 기념물과 동상 보존으로 역사를 지키자는 ‘문화전쟁’을 승리 이슈로 포착한 것이다.
3일 밤 마운트 러시모어 산기슭에서 역대 대통령들의 조각상을 배경으로 섰을 때도, 4일 밤 백악관 정원 독립기념 만찬에서도 트럼프는 ‘과격한 좌파들’의 “우리 역사를 말살시키고, 우리 영웅들을 훼손시키며, 우리 가치를 지워버리고, 우리 아이들을 세뇌시키려는 무자비한 캠페인”을 결코 허용치 않겠다며 이 ‘성난 폭도들’에게 굴복하지 않고 “우리의 가치와 전통, 관습과 신념을 안전하게 지키겠다”고 천명했다.
독립기념 축제를 당파적 선거유세로 이용해 ‘일부 백인들의 공포와 분개를 조장하는 인종주의 선거전략’이라고 진보미디어들은 즉각 신랄하게 비판했다. 2016년 이민자들을 희생양 삼아 인종 이슈로 지지층 결집에 성공했던 트럼프가 이번엔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블루 아메리카’를 ‘적’으로 설정해 또 한 차례 인종전쟁을 불 지피기 시작한 것이다.
워싱턴포스트의 표현에 따르면 트럼프는 “미국의 한 부분만을 위해, 한 부분만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트럼프가 어필하기 원하는 그 ‘한 부분’에겐, 대부분 미국인들을 아연케 한 트럼프의 분열적 연설이 “미국의 성공과 위대함의 역사를 극찬하는 희망의 메시지”로 가닿았다.
“역사를 지키려는 대통령의 단합 메시지가 핵심 지지층을 넘어 안전을 우려하는 유권자들에게 공감을 주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대통령 참모들은 “매일 자신의 정체성을 수치스럽게 여기고 싶은 사람은 없다”면서 이번 연설이 캠페인 재도약의 모멘텀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절박해진 트럼프가 택한 이 생존 작전은 이른바 ‘남부 전략’이다. 인종이슈로 백인표밭에 어필하는 공화당의 전략으로 닉슨에게 두 차례 대선 승리를 안겨주었고, 레이건과 아버지 부시도 성공적으로 활용했으며, 2016년 트럼프에게도 통했었다.
이번엔 다를 것이라고 뉴욕타임스는 분석한다.
무엇보다 미국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 구성이 갈수록 다양해지면서 사회이슈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젊은 층은 더욱 진보적이 되어가고, 많은 미국인들이 인종차별의 폐해로 ‘미국이 무너지는 것’을 인식하고 우려하기 시작했다.
또 문화전쟁을 부추기는 남부 전략은 호황에선 주효하지만 요즘 같은 절박한 위기에선 통하기가 힘들기도 하고, 이민이나 어퍼머티브 액션 등에 대해 온건한 보수 성향인 대다수 백인들에겐 편 갈라 선택을 강요하는 트럼프의 노골적 인종주의가 도를 넘어서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트럼프의 인종카드는 절대 무시해도 좋을 전략이 아니다. 피부 빛에 상관없이 대부분 미국인들은 남부군 장군들의 동상과 함께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 동상까지 철거하자는 요구는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침묵하는 다수’는 노예제도가 미 역사 최악의 오점인 것을 인정하는 한편 “놀라운 개척정신으로 언제나 보다 완전한 합중국을 향해 노력해온 미국의 과거를 자랑스러워하며 단 몇 년 만에 이 모든 것이 사라질까봐 두려워한다”고 한 보수 해설가는 말한다.
지지율이나 정치 환경, 어느 측면으로 보아도 현재 트럼프가 언더독인 것은 사실이지만 과소평가는 위험하다. 선거는 아직 넉 달 가까이 남았고 그동안 팬데믹이 가라앉고 경제가 회복하기 시작한다면 트럼프 지지율의 반등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거기에 더해 그가 생존전략으로 꺼내든 인종카드의 악영향도 벌써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트럼프가 백악관에서 인종분열을 부추기는 연설을 쏟아낸 4일 밤 샌프란시스코 인근 레스토랑에서 생일디너를 즐기던 남가주의 아시안 아메리칸 가족은 옆 테이블 한 백인남성에게 인종차별 봉변을 당했다. 그가 느닷없이 이들 가족에게 퍼부은 욕설은 “트럼프가 너희들을 쫓아낼 것이야!”로 시작되었다.
이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올리면서 이들 가족은 당부했다 :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란 사실이 캘리포니아처럼 다양한 얼굴의 진보적인 주에서도 인종주의자들이 증오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합니다… 금년 선거에선 제발, 제발, 제발 투표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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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