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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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터전을 부수지 마십시오”

2020-06-08 (월) 최진희 펜실베니아 주립대 성인교육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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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학교는 닫혔지만 캠퍼스 다운타운에는 모처럼만에 피켓을 든 시위대로 북적였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사건은 조용했던 다운타운을 뒤흔들었다. “흑인의 삶도 중요하다!” 사회정의가 무너졌다며 시민들은 분노의 구호를 외치며 다운타운에 몰렸다. 무지개 총천연색 옷을 입은 시민들이 유모차를 끌고 각양각색의 피켓을 들고 소리쳤다. 인근 해리스버그 지역에서는 폭력 시위로까지 번졌다고 한다.

마침 교육 대학교의 학장이 재학생 모두에게 묵직한 내용의 메일을 보냈다.


“우리 공동체는 추악한 현실을 묵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무지와, 증오, 그리고 편협을 직면하고 이와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교육자로서 교육을 통해 재발 방지를 위해 노력할 것이며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것입니다.” 학장님은 교육자로서의 자세와 미래 세대에 대한 책임을 설파했다.

언론과 대학원 학장, 그리고 격노한 미국 학생들은 메일과 SNS를 통해 조지 플로이드는 인종 차별과 경찰의 탄압의 희생자이고, 민주 시민이라면 이러한 불의에 대항하여 알리고, 분노하고, 외치고,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주요 언론매체의 보도와 각종 개인 SNS와 해당지역에 거주하는 교포들의 의견은 사뭇 달랐다. 일부 지인은 백화점을 털며, 보석과 가전제품을 훔쳐 물욕을 채우는 시위대의 양상을 보며 “강도와 약탈을 정의”로 포장하는 일부 주류언론의 사상적 행보에 혀를 찼다. 도덕이 사라진 상대적 정의는 앙꼬 없는 찐빵 같이 모두의 공감을 살 수 없었다.

또한 일부 한인들에게 이 시위의 양상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우리 동네는 전쟁 전야에요. 폭력사태 예방을 위해 24시간 매일 헬기가 하늘을 날고, 소방차 출동이 잦아요.” 특별히 LA지역과 워싱턴에 사는 교포와 유학생은 무장 시위단의 분노에 벌벌 떨며 재산과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만약 본 시위가 1992년 LA 폭동 같은 사태로 번진다면 아시안이기 때문에 애꿎은 희생자가 될 수 있다. 혐오의 종식을 주장하는 시위가 또 다른 공포와 두려움을 낳는 현장이 되고 있었다.

시위대의 분노와 과격한 표출은 개인의 일상을 파괴했다. “목숨이 제일 중요하잖아요. 그러니까 위험할 때 밖에 나가지 마요. 상점 터는게 제일 무서워요 ㅠ_ㅠ” 한 교포 친구가 고래싸움에 새우 등 터질까 전전긍긍하며 권고의 문자를 보냈다.

혹시라도 블랙시위의 피해자가 될까 봐 폭력과 약탈에 두려워하는 지인의 모습에서 시위대 피켓에 적힌 “숨을 쉴 수 없다” “평화가 없다” “정의가 없다”는 그들의 주장이 몹시도 공허하게 들렸다. 또한 피해자와 가해자가 묘하게 겹쳐 보였다.

여러 시위와 두려움의 소식을 접할 즈음, 조지 플로이드의 동생의 인터뷰가 냉수 한잔 같이 와 닿았다. “화를 내어도 좋지만 파괴적으로 행동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저희 형도 원하지 않았을 겁니다. 당신들의 삶의 터전을 부수지 마십시오. 정작 가족을 잃은 우리가 보다 건설적인 방법으로 정의를 추구하고자 하는데, 왜 당신들이 왜 거리에 나와서 도시를 부수고 분노합니까? 왜 여러분의 삶의 터전을 부수고 있습니까? 정의는 구현될 것입니다.”

시위대가 외치는 사회적 정의는 자의적 정의였다. 정작 조지 플로이드 가족의 의사는 아랑곳 없이 다수의 군중이 스스로 피해자가 되어 약탈과 화염을 정당화하며 경찰차를 부수며 또 다른 인종을 억압하는 상대적인 정의였다.

무엇보다, 피해의식에서 나온 분노와 혐오는 나와 우리의 일상을 부술 뿐 진정한 변화를 가져올 수 없다. 모든 문제를 계급과 제도 그리고 사회구조적 모순으로 바라볼 때 개인의 책임은 증발하고 정의는 그 빛이 바랜다.

<최진희 펜실베니아 주립대 성인교육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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