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흑인이 아니지 않습니까. 우린 흑인만 죽여요” 2017년 여름 조지아 주에서 음주운전 단속을 하던 백인 경찰이 손을 잘못 움직였다가 총에 맞을까 겁내는 백인 여성 동승자에게 셀폰을 꺼내 지인에게 알리라고 지시하며 태연히 건넨 말이다. 이 장면의 동영상이 공개된 후 경찰은 사임했으나 등골 서늘한 그의 말은 2016년 여름 미네소타 주의 비극을 상기시켰다.
자동차 미등이 나가 교통 단속에 걸린 흑인 청년 필랜도 캐스틸이 운전면허증을 보이라는 경찰 지시에 따라 면허증을 꺼내려고 손을 바지 뒷주머니로 가져가는 순간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 사건이다. 2급살인 혐의로 기소되었던 경찰은 1년 후 무죄판결을 받았다.
상당수 흑인들은 범죄 피해보다 경찰의 폭력에 더 공포를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 이코노미스트 조사에 의하면 63%의 흑인이 범죄피해를 당하는 것보다 자신이나 가족이 경찰폭력의 피해자가 되는 게 더 겁난다고 답했다.
미주리 주 퍼거슨에서 비무장 흑인 청소년이 백인 경찰에 사살당하고, 뉴욕에서 낱개 담배를 팔던 비무장 중년 흑인이 백인 경찰의 ‘목 누르기’로 숨지면서 미 전국이 분노의 시위로 뜨겁게 들끓었던 2014년만 해도 이 ‘공포’의 확실한 근거가 될 만한 포괄적 통계가 없었다.
지금은 있다. 2015년부터 워싱턴포스트가 실시간 경찰 총격 데이터베이스를 시작한 것이다. 4년 반 동안 4,400건의 경찰에 의한 총격사망 추적 결과를 분석한 포스트는 흑인 사망이 불균형하게 높다는 사실을 구체적 수치로 지적했다.
미 인구의 13%에 불과한 흑인이 경찰 총격 희생의 26%을 차지했으며 비무장 희생자의 경우에는 더 많아 36%나 되었다. 비무장 흑인이 경찰에 살해될 가능성은 백인보다 4배나 높았다.
오바마 대통령 시절 퍼거슨 총격으로 경찰 폭력에 대한 논쟁이 가열되면서 다각도의 경찰 개혁이 추진되어 왔다. 그러나 열흘 전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의 잔인한 목 누르기에 의한 비무장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과 그로 인해 미 전국을 휩쓸고 있는 분노의 항의시위 물결은, 경찰 개혁의 실현이 얼마나 험난한 도전인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이번 사태의 진앙지인 미니애폴리스 경찰국이 대표적이다. 2017년 미니애폴리스의 첫 흑인 경찰국장으로 취임한 머데리아 아레던도는 대대적인 ‘변화’를 약속했다. 2016년 캐스틸을 사살했던 경찰에게 무죄판결이 나오고 소수계에 대한 일련의 경찰 총격이 이어지면서 경찰과 흑인 커뮤니티 사이에 긴장이 고조될 때였다고 월스트릿 저널은 전한다.
아레던도 국장은 투명한 운영을 통한 신뢰 회복을 다짐하면서 경찰의 무력사용에 대한 제한과 바디카메라 착용 의무화를 강화하고 흑인 체포의 가장 큰 혐의 중 하나인 마리화나 경범 단속을 중단시켰다. 전임국장이 도입한 ‘생명 존엄성’ 정책도 이어갔다. 동료경찰의 가혹행위를 목격했을 때 파트너의 개입을 의무화시킨 것으로, 플로이드를 죽게 한 경찰 데릭 쇼빈을 현장에서 저지하지 않은 3명의 경찰을 해고할 때 적용한 근거가 이 규정이다.
아레던도의 개혁은 지역사회의 적극 협조 속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이번 플로이드 사망은 “미 경찰이 오래 견지해온 인종차별적 체계 속에 깊게 뿌리내린 조직문화”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를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미니애폴리스뿐 아니라 변화를 시도하는 모든 경찰국이 공감하는 이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부당행위 경찰에 대한 처벌의 어려움이다. 미니애폴리스 경찰국의 경우 2012년 이후 경찰에 대한 민간인의 고발은 2,600건이나 되었지만 관련 경찰 징계는 12건에 불과했으며 그중 8건은 서면 징계였고 가장 중징계는 40시간 정직이었다.
공무원에 대한 면책권과 함께 경찰 징계의 가장 큰 장애는 막강한 파워를 가진 경찰노조다. 경찰노조의 주요 업무 중 하나가 부당행위 경찰을 처벌에서 보호하는 투쟁이라고 LA타임스는 지적한다. 직권남용 경찰의 형사기소 여부를 결정하는 검사에 대한 경찰노조의 정치자금 기부를 금지하는 윤리규정 필요성이 강조되는 배경이다.
플로이드 사망으로 개혁의 어려움이 또 한 번 드러났지만 진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니애폴리스의 흑인운동가는 “우리에게 손조차 내밀지 않던 경찰국이 이젠 한 테이블에 앉아 의논하기 시작했다. 이 중대한 진전이 한 백인 경찰의 부당행위로 좌절될까 두렵다”고 우려했다.
2015년 오바마의 ‘21세기 경찰치안’ 태스크포스가 90일 동안 다각적 조사를 거쳐 작성한 보고서는 인종차별 비판을 받는 경찰의 신뢰회복을 위한 ‘정치적, 정책적, 전략적, 전술적, 도덕적 로드맵’으로 평가받지만 트럼프 취임 이후 사실상 폐기처분된 상태다.
앞으로도 미 전국 곳곳의 조지 플로이드들이 경찰에 의해 숨지는 비극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 발 내딛었다 두 발 되밀리는 느린 속도라도 개혁이 꾸준히 계속되어야 하는 이유다. 깊게 뿌리 내린 인종편견도 법적·제도적 규제가 강화되면 따라서 조금씩 퇴색하지 않겠는가.
흑인과 경찰의 관계도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갤럽조사에 의하면 흑인 응답자 61%가 경찰의 커뮤니티 보호에 신뢰를 표했고 72%는 대부분의 경찰은 커뮤니티에 긍정적 영향을 준다고 답했다. 꾸준한 경찰 개혁이 역시 정답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는 희망적 측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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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록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