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죽음이 실감나게 다가온 적도 없는 것 같다. 8개월 전 어머님을 천국으로 보내드리고 몇 주전 아버님도 어머님 곁으로 가셨다. 인간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어느 정도는 받아 드릴 각오가 돼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머나먼 남 이야기인줄 알았던 죽음에 대한 인식이 이번 코로나 사태로 인해 냉정한 현실로 다가온다.
지금의 현실은 내가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전쟁의 상황을 연상케 한다. 대포소리만 안들렸지 주위 상황은 전쟁시의 비상상태나 다름없다. 매일 들리는 소식은 누가 감염됐고 몇명이 죽었다 하는 이야기다. 직장은 폐쇄되고 사재기가 무성하다. 음식보다 더 중요한 화장지를 구입하려면 평상시 4배의 가격에 구해야 한다. 동네 길거리를 걷다 마추치는 행인이 있으면 평상시에는 인사를 했었겠겄만 지금은 서로 싸늘한 눈으로 재빨리 자리를 피한다.
모든 생물체는 죽음과 싸운다. 또 죽지 않기 위해 산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생존 본능의 핵심이다.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생명의 기본 욕구 앞에 자유스러울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질병으로 인한 통증도 힘들지만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것은 두려움이라고 한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병이 나지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 혹시 죽게 되는 것은 아닌가 등등에 대한 두려움이 환자의 제일 큰 적이라고 의사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태초에 질병이 만들어지기 전부터 인간은 두려움이라는 무서운 적과 싸우면서 살아왔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죄를 저지른 후 하나님이 부르자 두려움에 떨며 나무가지에 숨었다. 그의 아들인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 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으로 성을 높게 쌓고 그곳에 숨어 살았다. 인간의 삶 자체가 애초부터 두려움을 안고 살아온 듯 하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으로 인한, 또는 주어진 환경 등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제일 크다.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은 노력하면 어느 정도는 두려움의 원인요소를 제거할 수 있다. 이번 코로나 사태에 있어서도 제약회사는 백신을 만들고자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고 사회적으로는 물리적 거리두기 정책으로 서로간의 접촉을 최소화시키며, 자주 손 닦기 등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해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하고 있다.
그러나 지진과 같은 큰 자연재해나 대규모 질병의 발생은 우리가 나서서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닐 뿐더러 무슨 뾰죽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두려움을 피하고자 정작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무관심인데 그것 또한 쉽지 않다. 매일 들리는 뉴스소식은 코로나 사태 이야기 뿐이고 주위에서 이웃이 수없이 죽어 나가고 있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나 혼자 모른 체 할 수 있을까. 이 사태를 해결할 방법은 지금으로서는 없어 보인다. 그래서 더 두려운 것이다.
누군가의 글에서 두려움을 피할 수가 없다면 차라리 건강한 두려움으로 바꿔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한 글을 봤다. 그게 무슨 뜻일까?
최근에 미국에서 우리 한국인의 위상을 높힌 바 있는 추신수 선수에 관한 글을 보았다. 텍사스 감독의 인터뷰 기사였는데 추신수 선수의 건강한 두려움이 그를 최고의 자리에서 지켜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추신수는 적지 않은 나이에도 활약을 이어가는 비결에 대해 말했다. 그는 여전히 열린 자세를 갖고 있으며 누군가 그의 자리를 뺏을 수도 있다는 건강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는 그 자녀들에게도 이 라커룸과 클럽하우스가 언제나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친다고 한다. 그래서 항상 철저히 연습하고 준비한다. 그의 건강한 두려움이 37세의 나이에도 높은 타율을 유지하며 감독과 선수들에게 존경을 받는 이유라고 말한다.
두려움이 있어야 적을 피할 수 있다. 이 두려움이 없다면 멍청하게 있다 죽을 수도 있다. 추 선수가 갖고 있는 이 건강한 두려움은 우리가 불필요한 고난을 피하고 준비하고 노력하게 만든다. 특히 이 시점에서는 꼭필요한 조언이라여겨진다. 위험은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러나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이 두려움은 추 선수가 추구하는 성공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과는 조금 차원이 떨어지는 생존에 대한 두려움이다. 전문적인 용어로 표현하자면 그냥 죽을까봐 무서운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최선을 다해 보지만 그래도 어찌 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한계가 있지 않은가.
창초주가 인간의 삶의 의미를 부여했길래 나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겠지만, 어떻게 사는지 잘 모르겠고, 인생의 의미를 모르니 죽음도 모르고, 그러니 죽음이라는 것과 그 이후가 막연히 두려운 것이다.
근원에 대한 불안감이다. 평상시에는 막연히 '잘 되고 있다, 평안하다'라고 말하면서 끊임없이 자기 최면을 걸어 세뇌하며 세상의 흐름 속에 안정감을 누리고자 한다. '대충 살자, 다 그렇게 살아.' 표현은 안했지만 다들 마음 속으로 그렇게 느끼면서 살아온 것 같다. 그러다 이렇듯 갑작스런 재앙의 위기가 닥치면 안절부절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그리고선 누군가에 대해 이 재앙의 책임을 전가하고 그 자를 희생양으로 만들기도 한다. 위기 때마다 불거졌던 유럽의 마녀사냥이 그 좋은 예일 것이다.
로마제국은 250년 경쯤 공포스럽고 치명적인 흑사병이 일어났을 때 인구의 1/3이 사망했다. 모든 시민들이 병든 로마를 떠났다. 병든 가족을 버리고 심지어 의사도 도망갔다. 그러나 몇몇의 기독교 초대교인들은 도시를 떠나지 않고 남아서 병든 자를 돌봤다. 죽은 자를 매장하고 서로의 도리를 다 하면서 고통 받는 자를 저버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적나라한 본성을 드러냈다.
어떻게 이들은 자신들이 겪을 수도 있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았는가. 심지어 죽음을 뒤로하고 기꺼이 순교를 갈구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혹시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한 선명한 이해를 갖고 있지는 않았을까. 결국 그들의 헌신적인 봉사와 기꺼운 순교를 통해 당시 3천명 밖에 안됐던 기독교 인구가 200년 후엔 6백만이 되는결과를 만들었다.
로마의 초대교인들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실존하는 두려움이 없다면 그것은 마치 신천지교회가 질병확산 위협에도 불구하고 예배당 안에서의 예배를 고집하는 맹신 밖에는 되지 않는다.
초대교인들은 죽음을 결국 통과할 수 밖에 없는 창조주께로 가는 관문으로 여긴 듯하다. 죽는다 하더라도 그들을 지켜주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 반드시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믿음, 죽음을 인정하지만 그 후에는 하나님과 더 가까이 할 것이라는 소망이 그들을 지켜준 것 같다.
그떄 겪은 흑사병과 같은 질병이 이천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려고 한다. 그냥 두려움이 너무 커서 꼼짝 못하고 움추려들고 있다면, 그것을 무서움과 공포로서가 아니라 창조주를 공경하면서 주권을 인정하는 건강한 두려움으로 바꾼다면, 정말우리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위기에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 볼 기회로삼으면서 그저 견디고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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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에스라(변호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