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터 킹의 생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인 지난 월요일 20일, 버지니아의 주도인 리치몬드에서는 전 미국을 주목케 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버지니아 주지사가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긴장한 경찰이 만일의 사고에 대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함으로써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다.
전국에서 모인 2만 여명의 총기옹호자들과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유서 깊은 버지니아 주 의사당을 둘러싸고 총기 소유자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시위를 벌이면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던 위기의 시간이 잘 넘어갔다. 몇 년 전 동해병기 표기 운동을 하면서 많은 한인들에게 친숙했던 아름다운 주 의사당 건물 주위는 삼엄한 경비망으로 차단되었다. 무기를 소유하지 않고 의사당 밖 경내로 들어간 6,000여명과 총기를 소지하고 시위를 한 15,000여명의 데모대는 담장 밖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높였다. 주위를 철저히 통제하면서 일반 시민의 접근을 자제하도록 협조를 요청하였기 때문에 현장에 갈 수는 없었으나, 헬리콥터를 동원한 지역의 실시간 뉴스를 통해서 생동감 있게 현장을 보면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아무런 사고가 나지 않아서 참으로 다행이다.
지난 해 선거에서 상·하원 모두 다수당을 차지하게 된 민주당 주 의회와 역시 민주당인 주지사가 단단히 연합해서 이번 연초 회기에서 완만한 총기 규제법안을 상정하게 되었다. 엄청난 규모의 데모에도 불구하고 예정대로 법안은 주 의회에서 상정되었고 통과되었다.
리치몬드 지역의 열다섯 한인교회들의 연합체인 교회협의회(회장 전은기 목사) 신년 축복 성회가 열린 주 예수교회에 모인 지역 한인들은 이러한 사태를 주시하고 함께 지역사회를 위하여 공동기도를 드렸다. 지역 교회 연합체인 Interfaith of Greater Richmond에서는 감리교회에 모여 초 교파적인 기도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버지니아 주는 미 전역에서도 총기판매가 가장 활발한 곳이며, 동부 지역에서는 범죄 조장에 기여한다는 누명을 쓰고 있기 때문에 이번 결정은 앞으로 미 전역의 총기규제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전망된다.
그동안 워싱턴 D.C. 살인 사건에 사용된 총기의 47%가 인근의 버지니아 주에서 구입된 것이기 때문에 오명을 벗기를 바랐던 것이다. 심지어 뉴욕시에서 조차 버지니아의 느슨한 총기규제로 인한 피해가 많다고 항의할 지경이 되었으니, 입법자들은 적당한 기회를 통해서 새로운 법안을 마련하기를 틈틈이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난 해 버지니아 비치에서 벌어진 공공기관에서의 총기살인 사건 후 주지사가 새로운 입법을 강력히 추진하다가 전국총기협회(NRA)의 로비로 법안을 상정하지도 못하고 후퇴하였다가, 이번 2020 새해의 회기 시작과 함께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저항도 대단하였던 것이다.
총기규제를 반대하는 저항은 전국 총기소유자 협회 등과 같은 단체도 협력했을 뿐 아니라, 백인 우월주의인 White Suprimacy 옹호자들이 가세함으로써 그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수 년 전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샬롯츠빌의 사건을 일으킨 백인 민족주의자(White Nationalism)들의 리더는 이번 사태에 공감을 표하면서 동원에 적극 협력하였다.
사전에 치밀한 안전장치와 공권력을 집중 투여한 덕분에 그들의 총기를 앞에 멘 대담한 과시와 피켓과 구호를 앞세운 노골적인 반대행동에도 사고 없이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도 많은 총기살상 사건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시민들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총기소지 옹호자들의 목소리는 끊이지 않고 줄기차다. 스스로 자신들을 방어하려고 한, 민병대의 전통을 이어받은 이들의 굳건한 신념과 상업주의가 정치적 이해관계로 맞물려서 완강하게 저항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러한 총기소유 옹호론자들과 인종차별 주의자들이 함께 힘을 합하여 한 목소리를 내면서, 데모가 킹 데이에 일어난 것을 보면서 미국의 역사를 되돌리는 사회현상을 접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것이다. 미국의 사회발전을 후퇴시키는 먹구름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높이’, ’이웃을 향한 사랑의 넓이’, ’자신에 대한 사랑의 깊이’가 사랑의 정 삼각형을 이루는 ‘사랑의 공동체’(Beloved Community)를 궁극적 목표로 한, 킹의 인권운동을 기념하는 역사적인 날에 일어난 이러한 사태가 암시하는 의미가 크다.
갈수록 양극화 되어가는 세계적인 사회현상 속에서 ‘사랑과 정의’의 균형을 추구한 킹의 보편적 인류애가 점점 더 절실히 다가온다. 워싱턴의 광장에서 손을 끼우고 내려다보는 킹의 북소리가 들린다.
“우리들은 평화의 사회가 도래하도록 끝까지 가야합니다. 그 날은 백인들의 날도, 흑인들의 날도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사는 날입니다”(노벨 평화상 시상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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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현찬 목사 / 리치몬드 주예수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