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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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바다]싱클레어의 거짓말

2019-12-30 (월) 신선영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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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의 어린 싱클레어가 그의 덩치 큰 친구 크로머에게 말한다. 물방안갓 옆 과수원에서 사과를 친구와 훔쳐내었다고. 이 발언은 재미나게도 거짓말이다. 소위 말하는 허세, 그 나이만의 멋이다. 고작 사과 하나 훔친 것이 엄청난 영웅적인 행동이라도 된다고 거짓말까지 하나 싶다. 별 중요할 것 같지도 않은 작은 거짓말을 하면서 벌벌 떨고 있을 그가 귀엽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 거짓말은 주인공 싱클레어의 엄청난 비극적 난관의 시작이다. 그 뒤로 그 거짓말에 책임을 지기 위해 하나님께 맹세도 하고 아버지의 돈을 훔치기도 하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그 당시 싱클레어에게 과수원 사과를 훔칠만한 사람은 덩치 큰 크로머 앞에서 벌벌 떨고 있는 자신과 정확히 반대되는 대범하고 익살스러운 자신만의 영웅이었을 것이다. 그런 이상적인 영웅상과 초라한 현실 속에서 괴리감을 느끼며 열등감에 시달리는 싱클레어는 쉽게 상상해볼 수 있다. 동시에 그런 말을 어떻게 해서든 책임질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 어떤 오만이 함께 공존하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가 이 사소한 거짓말을 “죄"라 칭하며 그를 심히 질타하지는 않는다. 그 당시 커 보일 수 밖에 없는 여러 상황 속에서 비롯된 충분히 해봤을 만한 거짓말이니까. 우리 모두 가지고 있는 인정을 받고자,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과 상황이 빚어낸 그저 살아온 흔적이겠지. 하지만 싱클레어는 이 사건 이후 자유로움이 없는 지옥에서 살아간다. 크로머에게 받는 여러가지 괴롭힘 뿐 아니라 자신의 거짓말이 들통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엄청난 심리적 불안감 속에서 고통받는다.


어딘가 멋지고 신비로워 보이는 데미안의 등장으로 싱클레어는 잠시 지옥에서 벗어나는 것도 같다. 그동안 질문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잣대로 생각해오던 죄의 개념을 다시금 생각해보고 선과 악, 영웅과 악당, 빛과 어둠의 개념을 이분법적 사고의 틀 밖에서 곱씹어보게 된다. 그의 사상과 세계관은 조금씩 흔들리며 시간이 지나 그는 어느덧 나라를 위해 전쟁에 참전하는 어른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한 번도 그를 열등감과 오만이 공존하는 어리석은 거짓말을 했던 어린 싱클레어와 다르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조금 덤덤하게 지옥에서 살아가는 법, 모순적인 가치들이 충돌하는 애매한 그 세계에 조금 적응했을 뿐, 스스로 용서하지 못한 어린 싱클레어는 계속해서 그를 괴롭혀왔다.

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는 어른들이 하는 거짓말은 엄청 대단한 것인 줄 알았다. 엄청난 숭고한 가치가 숨겨졌다거나 배려로 똘똘 뭉쳐 그 깊은 속은 당최 알 수가 없다던가. 이런 깊이 있는 거짓말들도 있겠지만 어중간한 어른들이 부딪히며 살아가는 세계에서 내가 숱하게 듣고 뱉어온 거짓말들은 더할 나위 없이 유치하고 어리석다. 결국은 초라한 자신과 열등감으로 얼룩진 실체를 조금이나마 가려보겠다는 발버둥, 본인이 추구하는 영웅상에 허구로 자신을 대입 시켜 사랑받아 보겠다는 욕심, 그리고 이런 허구도 진실인 척 할 수 있을 거라는 뻔뻔함과 오만. 어린 싱클레어의 심리상태를 많이 닮아있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아이는 타락과 절망 뒤 용서와 구제를 비는 과정을 반복하며 열등감과 오만 사이에서 줄다리기 하며 힘겹게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런 척, 저런 척하며 거짓말을 실제 모습인 것처럼 위풍당당하게 살다가도 이를 의심하는 아주 작은 물음표에도 극심한 불안에 떨며 밤잠을 설친다. 쌓이는 허구와 타락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학습했을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그때 그 아이조차 내팽개치고 무관심으로 대응한다.

연말에는 새 시작을 위해 헝클어진 마음을 조금이나마 정리하는 따듯한 시기다. 예수가 실제로 12월 25일에 태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왜 용서와 대속을 상징하는 그의 탄생을 연말로 추측하는지는 얼추 알 것도 같다. 쌓여가는 부끄러운 거짓말을 들추지 않고 살포시 덮을 수 있는 사랑과 이해가 되지는 않아도 용서가 되는 기적이 필요한 날들이다. 인간보다 큰 무언가가, 선물같은 자비와 자유가 그 어느 때보다도 간절하다.

<신선영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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