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일 갈등과 레짐 체인지 괴담

2019-07-15 (월)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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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징비록. 난세 …. 또 뭐가 있더라. 그렇다. 이순신, 충무공 이순신이다. 일본이 한국에 대한 전략물자 수출규제 조치를 취해온 지 한 주. 그 기간 동안 한국 국내 언론매체에 자주 등장한 단어들이다.

이와 동시에 심심치 않게 들려온 것이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 괴담’이다. 일본의 수출규제는 워싱턴과 도쿄의 조인트 벤처로 내심 문재인 정부의 레짐 체인지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그 괴담이 처음에는 주로 우파 유튜브 방송을 타고 번져나갔다.

그런데 며칠 사이 그 괴담은 정부당국의 준 오피셜(official)한 버전으로 바뀌었다. 청와대 관계자가 ‘아베 일본정부의 반도체 소재 수출보복은 한국의 경제 불안을 야기해 문재인 정권을 교체하려는 국내 정치개입’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니까 아베 정부가 한국경제에 불안을 야기해 한국의 내년 4월 총선과 2022년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히려는 정치적 책동으로 청와대 관계자는 규정한 것이다.

유시민 노무현 재단이사장도 그 레짐 체인지 괴담을 거들고 나섰다. ‘아베 총리는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원치 않는다‘는 전제와 함께 “정권교체에 유리한 환경을 한국사회 내에 만들어 주자는 계산도 아베 정권 일각에서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발언을 한 것이다.

뭔가 한 가지가 집힌다. 그동안의 정부 여당의 행태로 보아 펄쩍 뛰면서 부인했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다름이 아니라 문재인 정부 레짐 체인지를 노리고 있다는 주장을 그것도 우파 유튜버들이 해댔으니. 그런데 그 괴담을 문재인 정부는 버전만 조금 바꾸어 받아들였다. 이를 도대체 어떻게 보아야 할까.

“한국과 일본은 지정학적 방향성 추구에 있어 입장이 달라져가고 있다. 두 나라 간의 갈등을 읽어내는 보다 중요한 키워드는 바로 여기서 찾아야한다.” 일본문제 전문가 피터 테스커의 진단이다.

일본은 일종의 ‘사죄 피로증세’를 보이고 있다. 또 삼성전자 등 한국의 전자산업이 비약적 발전을 할 때 반대로 일본의 전자산업이 뒷걸음치다 시피한데 대한 섭섭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의 한-일 갈등의 주원인은 달라진 지정학적 입장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주요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국 국민은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나라로 중국을 꼽은 반면 일본 국민은 미국을 지적했다. 한국의 대 중국 수출은 전체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16%를 차지한 반면 일본은 3%를 넘지 못한다.

한국인 중 일본과의 군사적 갈등사태를 우려한 사람은 28%, 또 38%는 일본을 군사적으로 위협적인 존재로 간주했다. 일본인의 경우 각각 9%와 12%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사실 제시와 함께 그는 한-일 두 나라 간의 상호불신을 선거용 정치공작 혹은 과거사 이슈의 시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오류라는 진단을 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의 대결, 제2의 냉전시대를 맞아 일본은 이미 ‘미국편으로 지정학적 방향’을 확실히 정했다. 반면 한국, 특히 문재인 정부는 아직도 미국이냐, 중국이냐, 미적거리고 있는 상태라는 것. 그러면서 선택이 강요된다면 중국 편이 될 것이라는 전망을 던지고 있다.

요약하면 과거사 문제 등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미국과 한 배를 탄 동맹관계였다. 그런데 그 진영에서 이탈해 친중, 친북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그것이 현재의 문재인 정부라는 것으로 갈등의 출발점도 여기에 있다는 거다.

이 같은 맥락에서 볼 때 ‘희망적 관측’이 다분히 섞인 것은 사실이지만 보다 진실에 가까운 괴담은 문재인 정부 길들이기 성격이 짙다는 장외 우파의 레짐 체인지 버전 같다.

그걸 정면 부인하려 들 때 득보다는 실이 많다. 차라리 한반도평화프로세스에, 또 철저한 반일 프레임으로 씌워 역선전에 나서는 것이 득이다. 이런 판단과 함께 일본의 경제제재를 ‘레짐 체인지를 노린 아베의 음모’로 가닥을 정리해 밀고나가는 것은 아닐까.

‘의병을 일으켜야한다’-. 일본정부의 반도체 소재 수출규제가 발표되자 여권에서 바로 나온 반응부터가 그렇다. 거기다가 연중무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친일잔재 청산작업이다. 친일로 낙인찍힌 작곡가의 곡이라는 이유로 교가가 폐지된다. 그것도 모자라 일상의 언어까지 일본냄새가 나면 절멸대상으로 삼는 등 반일 국수주의의 서슬은 퍼렇다.
그런 정황에서 문 대통령은 이순신 장군을 거론했다. “불과 12척의 배로 나라를 지켜냈다”면서.

수출규제 사태 이후 지난 8일 내놓은 첫 일성부터 “한국기업에 피해가 발생할 경우 필요한 대응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경고한데 이어 마침내 이순신 장군의 호국정신을 들먹인 것이다. 일찍이 중국과 북한 앞에서는 볼 수가 없었던 대찬 결기까지 보이면서.

문득 한 가지 생각이 스친다. 일본과의 관계를 이 지경으로 몰고 온 것은 혹시 미필적 고의성의 작전은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 이후 8개월 넘게 사태를 방치한 것도 모자라 ‘반일 종족주의(tribalism)’라고 할까 할 정도의 관제 민족주의 외교를 펼쳐왔었던 것이 문재인 정권이어서 하는 말이다.

문제는 대한민국의 안보다. ‘극도의 반일’에, ‘우리 민족끼리’는 외세배척, 더 나가 주한미군철수를 의미하는 개념으로 불분명한 주적개념과 함께 안보해체현상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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