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가족사진 속의 시간

2019-05-18 (토) 김영수 수필가
작게 크게
미국에 살고 있는 외사촌 오빠가 전화를 했다. 내 스마트폰에 들어있는 우리 가족사진을 우연히 보았는데 “(내 얼굴이) 어쩌면 고모를 닮아도 그렇게 꼭 닮았느냐”며,처음 보는 순간 고모 젊었을 적 사진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고모는 나의 친정어머니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우리가 캐나다로 이민 오기 전, 친정 식구들이 다 같이 모여 외식을 하기로 한 날이었다. 친정아버지는 모두 모인 김에 음식점 가기 전에 가족사진부터 찍자고 했다. 느닷없는 제안에 어리둥절한 우리는 나중에 옷이라도 잘 차려 입고 찍자며 내키지 않아했지만, 아버지는 ‘나중에’라는 게 어디 있느냐며 강행하셨다. 얼결에 따라나선 우리는 평생 별러서 한번 찍는 가족사진을 청바지와 후줄근한 티셔츠 차림으로 찍어야 했다.

아버지는 사진을 가로세로 1m가 넘게 인화해서 전시회에서나 봄직한 멋스러운 액자에 넣어 벽에 걸어두셨다. 사진 속 우리 가족은 입던 옷차림이라 촌스럽기는 해도, 그래서 오히려 더 친숙하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나중에 라는 건 없다”시던 아버지는, 그때가 마지막인 걸 예언이나 한 듯 이듬해에 이승을 떠나셨고 벽에는 가족사진만 덩그러니 남았다.


세월은 어김없이 흘렀다. 사진 찍을 당시에는 어리던 나의 아들이 캐나다에서 결혼식을 한 이듬해, 엄마를 뵈러 친정에 갔을 때였다. 아버지 생각이 나서 거실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바라보다 문득 마주친 엄마 얼굴. 젊은 엄마가 사진 속에서 웃고 있었다. 엄마라는 존재는 나이 든 노인이어야 한다는 듯, 그날따라 엄마가 젊다는 것이 왠지 낯설었다. 엄마 나이가 팔순을 훨씬 넘었고 나 자신이 이미 사진에 있는 엄마 나이가 되어 있어서 그랬을까.

개인의 기억과 경험도 기록을 통해 역사가 될 수 있듯이, 사진 한 장에 담긴 가족 얼굴에서 나는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사진 속 시간의 흐름을 읽으며, 젊은 엄마 얼굴에 나의 흔적이 들어있고 사진에 있는 엄마 얼굴이 바로 내 얼굴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엄마에게서 나에게로 대물림 되어온 삶의 행로를 떠올리고 있었다. 어릴 때는 철이 없어서 그랬을 테고 결혼하고 나서는 바쁘다는 핑계가 있겠지만, 엄마가 지나온 시간을 건너다볼 마음의 겨를이 그토록 없었을까 싶었다. 형체 없이 삭아서 내 몸의 일부가 되었을 엄마의 시간을, 나는 처음으로 가족사진 속에서 발견한 거였다.

훗날 내 아들이 지금 내 나이가 되었을 무렵, 어쩌다 꺼내본 사진 속 젊은 아빠에게서 제 모습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제 아빠가 처음부터 나이 든 사람이 아니라 그에게도 주체 못할 젊음이 있던 존재라는 걸 불현듯 깨달을지 모른다. 사진 속 아빠를 닮은 제 얼굴과 자기 얼굴에 스며있는 아빠의 시간을 발견하고 과거를 추억하는 아들 마음도 내 심정 같지 않을까.

언젠가 내가 사춘기를 막 지날 즈음, 사촌오빠가 내게 무엇인가를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우리 삶의 어긋난 시간을 노래하는 시가 적혀있었다.

“아이가 아빠와 같이 놀고 싶어 할 때 젊은 아빠는 너무 바빠서 나중에, 하며 미룬다.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늙고 외로운 아버지가 아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다며 손을 내밀자 아들은, 지금은 너무 바쁘니 나중에요, 하며 미룬다.”

자세히는 생각나지 않아도 대강 그런 내용이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생활에 떠밀려 어긋난 시간을 살다가, 아버지 죽음을 앞두고서야 보이는 늙은 아버지의 외로웠을 시간을 돌아보며 통한하는 시였다. 그 시를 읽고 ‘나는 그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다짐하던 기억이 나지만, 우리 부모님 삶도 내 앞의 삶도 그리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았다.

돌이켜 보면 무슨 대단한 삶을 사는 것도 아닌데, 시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처럼 우리 역시 발밑만 바라보며 ‘나중에’를 되풀이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두 아이를 둔 내 아들은 젊었을 적 제 아빠처럼 숨찬 시간의 궤도를 돌고 있고, 아들 아빠인 나의 남편은 초로에 접어든 아버지가 되어 구부정한 시간 속에 머물고 있다. 그때 읽은 시처럼 살지 않겠다던 다짐은 허튼 다짐으로 끝났고, 시 속의 그들과 별로 다를 것도 없이 황혼에 이른 우리 부부의 시간은 닳고 닳은 신발처럼 마냥 헐겁다.

무심하게 스쳐 보낼 뻔한 엄마의 시간을 빛바랜 가족사진 속에서 발견했듯이, 나이가 들어서야 앞서간 세월의 참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다. 그게 시간이 주는 힘인가 보다. 젊어서는 못 보던 소중한 것들을 뒤늦게 알아차리게 되는 눈뜸의 시간, 그 시간 앞에 내가, 그리고 우리가 있다.

<김영수 수필가>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