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음 다해 쓰는 편지

2024-03-29 (금) 박인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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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앞에 앉으면 눈이 딱 마주치는 곳에 지구본이 놓여있다. 지구본에는 바다가 많아서 대부분 불루톤이다. 그런데 내 지구본은 바다가 연한 핑크톤이어서 신비롭고 우아하다. 오래전, 동네 거라지 세일에서 우연히 그 지구본을 보았다. 첫눈에 반해서 두 번도 생각지않고 값을 치렀다. 장식용이라 정교하진 않지만, 지구의 세차운동을 반영해 축이 23.5도 기울어져 있고 지도로서의 모양새는 충분히 갖추었다.

이따금 지구본을 빙빙 돌려본다. 거기엔 지구상에 있는 모든 나라가 옹기종기 어깨를 맞댄 채 원을 이루고 있다. 육지가 끊기고 바다만 있는 부분도 있지만, 해저의 길도 가다 보면 결국 육지와 닿을 테니 원의 일부인 것이다. 가보고 싶은 나라를 만지며 상상하기도 하고, 향수병이 도질 때면 우리나라 지도를 보며 마음을 추스르기도 한다. 나라마다 지도 모양이 다르다. 팔이 안으로 굽어서인지 우리나라 지도가 제일 예쁘다. .

초등학교때 문방구에서 플라스틱으로 된 우리나라 지도를 팔았다. 토끼 모양의 지도가 너무 예뻐서 종이 위에 놓고 가장자리를 따라 많이도 그렸다. 그땐 몰랐다, 지도의 잘린 허리가 얼마나 아픈지. 한반도는 불행하게도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두 나라로 나뉘어 다른 체제 속에 산다. 국토의 허리도 고장 난 내 허리처럼 통증에 시달리고 궂은 날이면 전신이 쑤실 것이다. 북한에 가족이 있는 실향민이나 탈북민 혹 그 후손들이라면 아마도 그 허리를 꿰매 주고 싶을 것이다. 단체장이다 보니 이런저런 지역 행사에 가게 되는데, 언젠가부터 애국가 부를 때면 목구멍 뒤로 뜨거운 게 삼켜진다.


북텍사스이북도민회에서 고국방문단의 일원으로 한국에 방문했을 때 통일전망대와 판문점에 갔었다. 강 너머로 북한에 사는 주민들과 산, 마을이 보였다. 목전에 고향을 두고도 갈 수 없었던 노인이 통곡을 했다. 내 아버지를 보는 것 같아 나도 울었다. 아버지는 해주에서 태어나 월남한 실향민이셨다. 설날이면 임진각 합동망향제에서 실향민들과 차례를 드리며 눈물로 불효자의 무게를 덜곤 하셨다. 평생 통일을 기다리며 가족 상봉의 날을 기다렸으나 끝내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통일되면 꼭 찾아보라며 집주소와 형제자매 이름이 적힌 편지를 내게 주셨다. 우리 고모, 큰아버지, 작은아버지, 내 사촌들은 살아있을까? 죽기전에 아버지 소식을 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새들도 자유롭게 드나드는 그 땅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애태우는 이들이 서신이라도 주고받는다면 좋겠지만, 북한은 한국을 적대국으로 규정하고 평화통일을 포기하였다. “작년에 민간 차원의 교류는 서신교환 2건으로 전무하다시피 한 실정”이라는 기사를 보니 그 길도 막힌 듯하다.

전후 74년이 흘렀다. 세계일보 2월 11일 자에 실린 ‘이산가족 등록 현황’을 요약하면 “지난해 12월 말 기준 전체 이산가족 신청자 총 13만3,984명 중 3만9,953명이 생존하며, 80세 이상 고령 이산가족이 약 65.4%에 달”한다. 1세대는 자꾸 돌아가시는데, 통일은 요원하다. 이산의 아픔을 안고 사는 이들은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보내지 못할 편지를 마음으로 썼을 것이다.

민주평통댈러스협의회와 북텍사스이북도민회 공동 주최로 ‘북한 동포에게 편지쓰기 대회’를 개최하였다. 한 달간 접수 받아 가정의 달 5월에 시상하려 한다. 북한 동포에게 편지를 전할 방법이 현재로선 없다. 그러나 평화통일을 향한 작은 마음들이 모이면 언젠가는 전할 날도 오리라 믿는다. 북한의 현실과 동포를 생각하며 편지를 써보는 행위만으로도 조국의 현실에 관심을 두게 되고, 탈북민이나 실향민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북한 동포들의 인권 보호를 위한 기도가 필요한 때이다. 부치지 못할 편지지만, 우리의 염원을 담아 작은 씨앗을 심어 보는 거다.

<박인애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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