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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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창] 독자를 위한 기도

2019-04-23 (화) 12:00:00 박주리(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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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의 ‘님의 침묵’을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 압축, 비약, 상징이 많은 운문을 썩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님을 향한 시인의 애절함과 불운한 시대 속에서도 희망의 횃불을 들어올리는 시인의 의지가 가슴에 와닿았던 것 같다. 떠나버린 님을 차마 보내지 못하는 그의 애틋함이나 한줄기 빛을 부여잡는 그의 절박함과는 달리, 정작 님은 너무 무기력하고 수동적이고 연약한 실체를 드러내는 것 같아 안타깝기도 했다.

님의 침묵이 세상에 나오고 약 한세기의 시간이 흘렀다. 그가 노래했던 ‘님’이 조국이라면 그토록 염원했던 희망은 현실이 되었고, 님의 침묵은 승리의 함성이 되어 조국 강산을 뒤덮은 셈이다. 슬픔과 절망은 사라지고 기쁨과 행복이 넘치는 세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하지만, 그사이 시대가 달라졌다. 한 세기를 지나오면서 독립은 대립을, 자유는 방종을 낳았다. 경제 성장률은 올라갔지만 오히려 경제 부담은 가중되고 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각자의 어깨에 둘러멘 인생의 무게에 짓눌려 아우성치는 세상이다.

이 소란한 세상의 중심에서 나는 다시 님의 침묵을 묵상한다. 무기력하고 연약한 침묵이 아니다. 분출할 지표면을 찾아 꿈틀거리며 끓어오르는 마그마처럼 강력한 침묵이다. 절망의 산을 터뜨리고 새로운 창조의 도약을 시도할 침묵이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눈앞에서 홍해를 두 동강 내버린 거대한 침묵이다. 그리고 그 침묵의 외침을 듣는다. 너희는 잠잠하라고. 아비규환인 세상을 보며 놀라지 말고 침묵의 힘을 믿어 보라고.


분주하고 시끄러운 마음을 가다듬고 침묵의 공간으로 들어간다. 작은 창 너머로 사람들이 보인다. 인생의 묵상을 함께 나눈 정든 이웃들이다. 차 한잔의 여유를 타고 소통의 선의를 베풀어 준 고마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이 이런 세상 되게 하소서. 감추인 것이 드러나고 숨긴 것이 알려지는 투명한 세상. 정직과 공의가 대접받고 거짓과 불의가 수치를 당하는 깨끗한 세상. 의식주를 위해 일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가치를 위해 기여하는 아름다운 세상. 이런 세상이 속히 오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상에 물들지 않는 순결함과 세상에 휘둘리지 않는 지혜와 세상을 이기는 용기를 품게 하소서.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들이 더 아름답고 행복하게 하소서. 나는 이렇게 여성의 창 독자들을 온마음으로 축복한다.

<박주리(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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