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로마’

2019-03-02 (토)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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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내가 아카데미시상식을 보는 이유 중 하나가 해마다 일어나는 이변 때문이다. 예상과는 전연 다른 후보가 수상하는 것을 볼 때 갖는 느낌이야말로 스릴러영화를 보는 것과 유사하다. 2월 24일에 열린 제91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도 어김없이 이변이 일어났다.

작품상을 탈 것이 거의 분명했던 ‘로마’(Roma)가 고배를 마시고 대신 ‘그린 북’(Green Book)이 트로피를 거머쥔 것이다. 모두 10개 부문에서 수상후보에 오른 ‘로마’는 멕시칸 감독 알폰소 쿠아론(사진 왼쪽)의 1970년대 소년시절의 추억담으로 로마는 멕시코시티의 중류층이 사는 동네이름이다. 스페인어와 멕시코 원주민어로 된 흑백영화로 쿠아론과 그의 가족의 일상사를 집에서 고용한 젊은 식모(얄리차 아파리시오-사진 오른쪽)의 눈을 통해 얘기하고 있다. 여러 면에서 1970년대 한국 사정과 닮았다.

나는 스트리밍업체 넷플릭스가 제작한 이 영화를 작년 토론토영화제서 처음 보고 지난 연말 TV로 다시 봤는데 비평가들의 격찬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거리감을 느낀 바 있다. 마치 사진전시장에서 흑백사진들을 보면서 ‘참 잘 찍었구나. 아름답네’라고 생각하면서도 감정적으로 작품 안으로 함몰되지 못하는 듯한 아쉬움을 느꼈다.


이번 시상식에서 ‘로마’가 촬영상과 외국어영화상 및 감독상을 받았을 때만해도 이 영화가 작품상을 탈것은 떼논 당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상은 1962년 미 남부를 순회 연주하는 흑인 피아니스트(마허샬라 알리)와 그의 인종차별주의자인 백인 운전사(비고 모텐슨)와의 관계를 통해 흑백문제를 다룬 ‘그린 북’이 탔다.

전문가들은 ‘로마’가 상을 타지 못한 이유로 우선 이 영화가 극장이 아니라 TV를 통해 영화를 방영하는 넷플릭스의 작품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그리고 외국어영화(오스카사상 지금까지 외국어영화가 작품상을 탄 적은 없다)라는 것과 ‘그린 북’이 ‘로마’보다는 대중의 마음을 편하고 즐겁게 해주는 영화라는 점을 들고 있다. 쿠아론으로서는 섭섭한 일이겠지만 혼자서 3개 부문 수상자가 된 것으로 만족해야할 것만 같다. 모든 길은 반드시 ‘로마’로 통하지만은 않는 것 같다.

‘그린 북’은 비평가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영화다. LA타임스의 저스틴 챙은 25일자 기사에서 “‘그린 북’은 2005년 작품상 수상작인 ‘크래쉬’ 다음으로 최악의 작품상 수상작”이라고 질타했다. 비평가들이 이 영화에 등을 돌린 이유는 흑백문제를 너무 안이하게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복잡한 흑백문제를 백인의 눈으로 서술하면서 만사형통 식으로 매듭짓는 관객의 비위를 맞추는 고루한 스타일의 영화라는 것. 말하자면 백인을 위한 흑백문제 해결 교본이라는 것이다

‘그린 북’은 역시 오스카 작품상을 탄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와 닮은 구식영화로 아직도 나이 먹은 백인들이 대다수인 어카데미회원들의 입맛에 딱 맞는 영화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작년 토론토영화제서 관객인기상을 타면서 오스카상 후보감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어 연초 골든 글로브시상식에서 각본상을 탄데 이어 지난 1월에는 제작자협회상을 타면서 강력한 오스카 작품상 후보작으로 대두했다.

‘그린 북’은 이번에 작품상 외에도 각본상과 마허샬라 알리가 남우조연상을 탔다. 알리는 이미 2년 전 ‘문라이트’로 오스카 조연상을 탄바 있다.

‘로마’의 작품상 탈락에 버금 갈만큼 놀라운 이변이 여우주연상이다. 이 상은 이번으로 모두 7차례 오스카 수상후보에 오른 ‘아내’(The Wife)의 글렌 클로스의 것으로 예견됐었다. 클로스는 여기서 수십 년간 독선적인 작가 남편의 글을 자기가 쓰다시피 하면서 뒷바라지를 해오다가 남편이 노벨상을 받기 직전 독립을 선언하는 아내로 나와 섬세하고 민감한 연기를 한다. 클로스는 이 역으로 올 골든 글로브상(드라마)을 탔다.

그런데 여우주연상은 얄궂은 궁정 드라마 코미디 ‘페이보릿’(The Favorite)에서 변덕스럽고 모시기 힘든 영국여왕 앤으로 나온 올리비아 콜만이 탔다. 콜만의 연기가 훌륭하기는 하나 클로스의 탈락은 화들짝 놀랄만한 이변이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특기할만한 것은 중요 부문의 수상작들이 전부 내가 속한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가 1월 초에 시상한 골든 글로브 수상작과 같다는 점이다. 작품상(‘그린 북’-코미디/뮤지컬), 감독상(알폰소 쿠이론), 남우주연상(라미 말렉-드라마), 여우주연상(올리비아 콜만-코미디/뮤지컬), 남우조연상(마허샬라 알리), 여우조연상(레지나 킹), 각본상(‘그린 북’), 외국어영화상(‘로마’), 주제가상(‘스타 탄생’의 ‘쉘로우’) 및 만화영화상(‘스파이더-맨-인투 더 스파이더-버스’) 등이 전부 골든 글로브상을 탄 것들이다. 아카데미 회원들은 골든 글로브상이 자신들의 투표에 아무런 영향도 안 미친다고 말하고 있지만 글쎄올시다.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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