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가렛 다리와 카페 후켓

2019-10-12 (토)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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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렛 다리와 카페 후켓
마가렛(헝가리어로 Margit) 다리(사진) 아래로 두나 강은 입을 다문채 흐르고 있었다. 강은 지난 5월 한국인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을 자기가 삼키고도 그 것을 벌써 까맣게 잊은 듯 했다. 야속한 느낌이 들었다. 부다페스트의 숙소에서 물어물어 30분을 걸어 사고지점인 다리를 찾아갔다. 청명한 날씨에 다리 위로는 행인들이 오가고 다리 아래로는 유람선이 마치 무성영화에서처럼 소리 없이 지나간다.

내가 번개 불에 콩 구어 먹 듯 한 여정에도 불구하고 부다페스트를 찾은 것은 장엄한 의사당건물 근처에 있는 마가렛 다리를 육안으로 보고파서였다. 다리를 찾아가 사망한 사람들에게 조의를 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 위에서 잠시 머리를 숙이고 그들을 위해 기도했다.

여행 짐을 꾸린 또 다른 이유는 파리의 카페 후켓. 9월23일부터 28일까지 부다페스트와 파리에 다녀왔다.


부다페스트 방문은 TNT가 방영할 살인미스터리 시리즈 ‘에일리어니스트:암흑의 천사’의 셋방문과 다코다 패닝 등 스타 인터뷰 그리고 막 개봉한 액션영화 ‘제미니 맨’의 감독 앙리와 제작자 제리 브루카이머 및 주연 윌 스미스와의 인터뷰 차. 1890년대 말 뉴욕의 브로드웨이를 재현한 셋은 매우 정교해 보자니 과거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이튿날 만난 앙리는 여전히 겸손했고 윌 스미스는 활기차고 명랑했다.

파리로 가려고 부다페스트공항에 도착했는데 항공사직원이 나보고 내 이름이 대기자 명단에 올랐다며 오늘 못가면 내일 아침에나 떠날 수 있단다. “무슨 소리냐”며 예약확인서류를 내미니 그제야 탑승권을 준다. 내 생각엔 이 친구가 예약초과를 한 비행기에 다른 사람을 태우려고 야바위꾼 짓을 하는 것 같았다.

초가을 밤비 속에 파리에 도착했다. 이튿날 패라마운트 네트웍이 방영할 드라메디 시리즈 ‘파리의 에밀리’를 찍는 카니발 뮤지엄에서 촬영을 관람하고 주인공 릴리 칼린스를 인터뷰했다. ‘라데즈키 행진곡’에 맞춰 빠르게 돌아가는 케케묵은 회전목마를 타고 아이처럼 굴었다.

여기서 에밀리의 친구로 나오는 한국계 뮤지컬 배우 애슐리 박을 만났다. LA인근 글렌데일에서 태어나 현재는 뉴욕에 사는 애슐리는 뮤지컬 ‘민 걸즈’로 토니상 후보에 올랐던 재원. 그에게 “나도 박씨”라며 다가가 악수하고 잠시 대화를 나눴다.

공식 일정이 끝난 오후 2시께부터 이튿날 아침 샤를르 드골공항에 갈 때까지 자유시간. 할리웃 외신기자협회(HFPA) 동료회원인 스웨덴 태생의 키다리 친구 마그너스와 함께 거리산책에 나섰다. 숙소 근처의 개선문을 등에 지고 관광객들로 도떼기시장을 방불케 하는 샹젤리제를 따라 센 강 쪽으로 걸었다. 가다보니 오른 쪽에 군복을 입은 드골 동상이 서있다. 개선문과 드골하면 알제리 독립을 허락한 드골을 암살하려는 재칼의 얘기를 그린 영화 ‘재칼의 날’이 생각난다. 에드워드 폭스가 재칼로 나오는 이 영화 굉장히 재미있다.

센 강변을 따라 에펠탑 근처에 이르니 가까이서 본 에펠탑이 마치 기념품처럼 작게 보인다. ‘낭만의 도시’ 파리는 참 아름다웠다. 건물들이 우아하고 고상하고 품위가 있다. 마그너스가 “이에 비하면 LA는 볼품이 없다”며 투덜댔다.

방향을 틀어 개선문 쪽으로 걸으니 저만치에 빨간 텐트가 특징인 카페 후켓이 보인다. 얼마 전 반정부 시위대인 ‘노란 조끼’들이 카페를 때려 부셨는데 어느새 말끔히 보수하고 손님을 맞는다. 후켓은 레마르크의 동명소설이 원작인 영화 ‘개선문’에서 파리의 두 이방인 연인 라빅(샤를르 봐이에)과 조앙(잉그리드 버그만)이 육체적 정염을 불사르기 전에 자주 들러 사과브랜디 칼바도스를 마시던 곳. 개선문에서 가깝다.

마그너스에게 술도 사주고 내가 후켓을 찾는 이유도 들려주겠다며 함께 들어섰다. 노천의자에 앉고 싶었으나 자리가 없어 안으로 들어가 난 칼바도스를 마그너스는 하이네켄을 마셨다. 짜릿한 맛에 여독이 녹아드는 것 같았다. 그런데 칼바도스 한 잔에 무려 24유로. 마그너스에게 ‘개선문’의 라빅과 조앙의 비극적 사랑과 후켓과 칼바도스의 얘기를 들려줬더니 “참 로맨틱 하네”라며 미소를 짓는다.

파리하면 언뜻 눈에 떠오르는 것이 노천카페. 내친 김에 노천카페를 찾았다. 비스트로 데 샹이라는 이름의 카페 밖의 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바라보는 행인들이 마치 시간과 세월처럼 지나간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개선문에 들렀다. 꼭대기는 사람들로 초만원이어서 그냥 아래서 구경했다. 개선문 주위로 차들이 실타래 감듯 뱅뱅 돈다. 여정에서 남은 시간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파리 산책이었다. .

‘카사블랑카’에서 릭은 자기를 떠나지 않겠다며 눈물을 흘리는 일사에게 “위 윌 올웨이즈 해브 패리스”라며 달랬다. 호텔로 돌아오면서 내가 마그너스에게 “야 이제 우린 서로에게 ‘위 윌 올웨이즈 해브 패리스’라고 할 수 있겠네”라고 말하자 마그너스가 “예스, 위 캔”하면서 씩하고 웃는다. .

<박흥진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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