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세 성받이 밥과 백가반!´

2019-02-19 (화)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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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기해년 황금돼지 해이다. 오늘은 양력 2월 19일. 음력으로는 1월15일, 정월 대보름이다. 정월 대보름이란, 음력으로 새해 첫째 달의 보름달이 뜨는 날을 말한다. 설을 맞이하고 첫 번째 보름달이기에 큰 보름(대보름)의 의미가 있다.

이민 생활을 하다보니 절기에 대한 감각없이 지내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서울서 자랄 때는 절기 때마다 다양한 풍습을 즐길 수 있었다. 어렸을 적 기억으로 명절인 설보다는 대보름이 더 특이했던 추억으로 남아있다.

어린시절 대보름에는 동네에서 연을 날렸다. 한 참 연을 날리다 저녁무렵에는 연줄 끊기를 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줄이 끊긴 연들이 하나 둘 비틀거리다 날아가버린다. 그 때 연줄 끊기는 승자와 패자를 가리는 승부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한 참 커서야 그 것이 대보름 풍습인 줄 알게 됐다.


옛 아이들은 대보름 전날인 열 나흗날에 연을 모두 날려 보냈다고 한다. 겨우내내 연을 띄우고 놀다가 농사가 시작하는 정월 대보름 이후엔 연과 인연을 끊은 것이다. 다른 연들보다 커서 더 멀리 나가는 귀머거리장군까지 날려 보내는 액땜 행사였다. 연에 송액만리(送厄萬里)·송액영복(送厄迎福)·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고 쓴 것은 그래서다. 뭔가 멀리 떠나가는 것을 빗댄 ‘정월 대보름날 귀머거리장군 연 떠나가듯’이란 속담도 여기서 유래했다.

아침에는 부럼깨기를 했던 추억이 남아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밤, 땅콩, 호두 등을 깨물었다. ‘딱’ 소리를 내며 깨물어서 마당에 버렸다. 그리고 한 해동안 잡귀가 달아나고 부스럼이 나지 않게 해달라고 축원했다. 부럼은 겉이 딱딱한 견과류다. 이를 깨물면 이가 튼튼해 질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다. 부럼은 부스럼의 줄인 말이라고도 한다. 그러니 피부가 단단해져 종기가 안 나도록 해달라는 의미도 담고 있었던 셈이다.

아침엔 ‘더위 팔기’에 열광했던 기억도 떠오른다. 대상은 작은누나나 친구들. 이날 아침에 만난 사람의 이름을 부른 뒤 대답하면 ‘내 더위 사 가라!’며 더위를 팔고 다녔다. 이는 마음적으로 그 해 여름 폭염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미리 심어주는 심리전(?) 때문이었을 게다.

대보름은 못살던 시절이라도 배 터지게 먹을 수 있었던 날이었다. 특히 찹쌀과 밤, 대추, 잣, 꿀 등을 넣어 만든 약밥이 먹거리로 등장했다. 오곡밥도 빼 놓을 수 없다. 작은 밥 그릇과 숟가락만 들고 친구집을 돌아다니며 오곡밥을 얻어 먹었다. 그러면 봄을 타는 아이들이 야위지 않고 건강하게 자란다고 했다. 반찬 역시 평소와 다르게 풍성하다. 고사리, 버섯, 호박고지, 무말랭이, 가지나무, 산나물, 취나물 등 말린 나물이 밥 상에 가득하다. 어머니들은 묵은 나물을 먹으면 그 해에 더위를 타지 않는다며 많이 먹도록 했다. 복쌈을 하면 복이 들어온다며 김이나 취잎사귀로 오곡밥을 싸 주시기도 했다. 어른들은 아침에 데우지 않은 찬 술을 마셨다. 귀밝이 술이라하여 일년 내내 귀가 잘 들리고 좋은 소식만 듣게 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대보름날에는 해서는 안 되는 것들도 많았다고 기억된다. 찬물을 못 먹었다. 여름내내 더위를 먹는다는 이유였다. 비린 생선을 먹으면 여름에 파리가 꼬이고 몸에는 부스럼이 생긴다며 비린 것을 먹지 말라는 금기도 있었다. 개에게 밥도 주지 못했다. 밥을 주면 개가 여름 내내 잠을 많이 자며 파리가 많이 달려든다는 이유다.. 칼질을 하면 상서롭지 않다고 보아 칼질을 하지 않았다. 아침에 마당을 쓰면 한 해 복이 나간다고 여겨 마당도 쓸지 않았다. 오후에 빗자루 질을 할 때도 바깥쪽이 아니라 안쪽을 향하도록 했다. 복이 집 밖으로 나가지 말고 안으로 들어오도록 한다는 의미였다.

오늘은 정월 대보름이다. 대보름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오곡밥이다. ‘세 성받이 밥’은 김, 이, 박 등 세 성씨의 밥을 말한다. 오곡밥은 다른 성을 가진 집의 밥을 세 번 이상 먹어야 그 해의 운이 좋다는 뜻이다. 오곡밥의 별칭인 백가반은 여러집의 밥을 뜻하며 백 집이 나눠 먹는 것이 좋다는 의미다. 정월대보름을 맞아 한인사회가 이웃들과 서로 더 나눌 수 있는 ‘나눔실천’이 풍성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연창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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