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발언대] 21세기 사색당파 정치

2025-03-14 (금) 08:08:50 신응남/변호사·15대서울대미주동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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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도루’는 조선 총독부가 식민사관 목적으로 펴낸 ‘조선인, 1921’에서, 조선인의 ‘형식주의, 문약함’ 등을 지적하고, 대표적 심성으로 ‘당파성’을 들며, 그것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다카하시 도루가 주장하는 ‘당파성’의 발단은 선조 8년(1575)에 이조 전랑직을 둘러싼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에서 비롯되었다.

이조 전랑은 5품이지만 인사행정을 맡는 실무직이었고,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언론을 주도하는 사림정치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했다.
김효원이 이조전랑 자리에 천거될 때는 심의겸이 반대했고, 심의겸의 아우 심층겸의 천거때는 김효원이 반대했다.

이런 두 사람의 대립을 둘러싸고 최초로 조선의 붕당이 시작되었다. 신진관료인 김효원의 동대문집을 ‘동인’으로 유성룡 등 퇴계의 뜻을 따르는 영남학파가 속했고, 기성관료인 서대문쪽 심의겸의 집은 ‘서인’으로 윤두수 정철 등 주로 율곡의 기호학파가 이에 속했다.


당쟁 초기에는 대체로 ‘동인’ 세력이 정치를 주도했으나, 정여립이 왜란중 반란을 계획하다가 발각되어 동인들이 수세에 몰렸다. 한편 서인인 정철이 세자 책봉관련 문제를 둘러싸고 선조의 미움을 사서 축출되자, 정철의 처벌수위를 갖고, 다시 득세한 동인은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고, 임진왜란 직후는 ‘북인’이 정권을 잡고 광해군을 도와 명청간 실리적 중도 외교를 펴나갔다. 그러다, ‘서인’을 중심으로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1623)이 성공후, 북인은 권력 밖으로 쫓겨났다.

‘남인’은 호란 이후, 서인 정권이 추구한 무리한 북벌 운동을 비판하면서, 효종이 상을 당했을 시 효종의 계모인 장렬왕후의 복제문제로 대립한 예송논쟁를 일으켜 서인과 대립하며, 사색당파의 붕당정치는 한동안 남인과 서인의 대립으로 이어져갔다.

우리에게 당파성이 대표적 특성으로 자리잡게된 원인들을 보면, 일상적 삶 속에 스며들어 있는 연고주의와, 정실주의를 들 수 있다. 그 누구도 그걸 배척할 ‘죄악’ 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다수는 사람 사는 세상에 필요한 ‘인정’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은 출세하기까지 가문의 적극적 지원을 받으며, 출세는 가문의 영광’으로 간주된다. 충보다 효를 앞세우는 한국인은 국가보다 대체적으로 가족과 가문의 이익을 앞세우는 경향이 강하 며, 이는 부정부패가 성행하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신라시대부터 전해오는 윷놀이에는 무엇인가 한국적인 당파성으로 야기된 비극이 서려 있는 것 같다. 던져진 윷가락은 엎어지기도 하고 젖혀지기도 해서 그때 그때의 운명도를 만들어낸다.

윷말판 위에서의 극적인 연출은 사화당쟁의 압축판이라 할 수있겠다. 또한 ‘파당’이라는 운명의 형세 밑에서 권력의 부침이 역동적으로 전개된다고 보인다.
조선 왕조 오백년, 민초들은 배고파서 울고, 권문세도가들은 폐족이나 삼족을 멸하는 살벌한 사화 회오리 바람속에서 피눈물을 흘렸다.

최근의 한국 정치도 사색당파의 권력을 잡기위한 목숨건 투쟁의 연장 선상에 있다고 보여진다. 12.3 비상계엄의 여파로, 대통령 권력이 정지된 현 탄핵 상황은 마치 사화의 소용돌이 속 피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것 같다. 비상계엄에 동원된 별들이 사화의 바람속에 허망하게 떨어지고 있다.

초나라 굴원은 명시 ‘어부사 魚夫辭’ 에서,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라고 읊었다.
주군의 신임을 잃고, 나라를 구할 수 있는 현인을 만나지 못하는 근심이 깊다. 을사년도 어느덧 삼월 중순, ‘국태안강(國泰安康)’을 기원하며 가슴을 쓸어내린다.

<신응남/변호사·15대서울대미주동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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