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문화 도용

2019-01-14 (월) 송영규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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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파식적 萬波息笛

패션쇼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머리 장식을 사용한 데 대해 유감을 표합니다. 누군가의 기분을 나쁘게 할 의도가 절대 없습니다. 앞으로 이 장식을 어떤 용도로도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2012년 11월 미국 주요 언론에 속옷 업체 빅토리아 시크릿의 사과 기사가 등장했다.

패션쇼에서 속옷 모델이 원주민 머리 장식을 하고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전사에 대한 존중과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을 벌거벗은 여성이 착용하고 나왔으니 원주민 사회에 난리가 난 것은 당연했다.


‘문화 도용(cultural appropriation)’이라는 비난에 업체와 속옷 모델은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문화 도용이란 주로 주류 문화가 비주류 문화의 전통이나 관습·언어·노래 등을 베끼는 현상을 말한다. 물론 문화 간 상호작용은 필요하다. 문제는 다른 문화의 결과물들을 그냥 베낄 때 나타나는 몰이해다.

영국의 해리 왕자는 2003년 학교 과제물로 호주 원주민들의 벽화 등에 묘사된 도마뱀을 그린 그림을 제출한 후 호주 원주민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했다. ‘원주민의 영감을 담지 못하고 그냥 베낀 작품’이라거나 ‘우리 문화를 훔친 것’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호주 원주민 단체가 해리 왕자에게 항의서한을 보낸 것은 당연한 결과다.

문화 도용 문제가 본격화된 것은 21세기 이후 식민지나 원주민 사회가 토착 문화에 대한 자긍심에 눈을 뜨면서부터다. 자신들의 문화를 보호하고 서구 자본주의가 제멋대로 왜곡하고 남용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2007년 유엔총회가 144개국의 찬성으로 ‘원주민 권리에 대한 선언’을 채택하고 ‘원주민은 자신의 문화유산·전통지식 등을 통제·보호·개발할 권리가 있고 그에 대한 지적재산권을 유지·통제·보호·개발할 권리가 있다’고 적시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시대적 흐름의 결과였다.

월트디즈니가 24년 전 상표권 등록을 했던 애니메이션 ‘라이온 킹’에 나오는 ‘하쿠나 마타타(걱정 말라)’라는 스와힐리어 대사가 문화 도용 논란에 휩싸였다. 짐바브웨와 케냐·탄자니아 등 아프리카 국가들이 ‘디즈니 상표권은 탐욕의 결과물이며 스와힐리어를 사용하는 이들과 아프리카 전체에 대한 모욕’이라며 취소 청원 운동을 벌이고 있다.

삶의 애환과 지혜가 깃든 자신들의 문화를 단순한 흥밋거리로 전락시키지 않으려는 이들의 노력이 결실을 거둘 수 있을지 궁금하다.

<송영규 서울경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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